좋은 분이 주는 것은 다 좋다 -하느님의 선물-2019.4.6.사순 제4주간 토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Apr 06,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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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4.6.사순 제4주간 토요일                                                                             예레11,18-20 요한7,40-53 

 

 

 

좋은 분이 주는 것은 다 좋다

-하느님의 선물-

 

 

 

어제 수녀님과 나눈 유쾌한 청담(淸談;속되지 않은 맑고 고상한 이야기)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유치하다 생각될 듯 하지만 저는 깊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수녀님이 수녀원에 고백성사를 주러 온 고마움의 표현으로 먹을 것을 주었고 저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 먹었습니다.

 

“제가 드린 것 마음에 들었습니까?”

“예, 수녀님이 주는 것은 다 마음에 듭니다. 좋은 분이 주는 것은 다 좋습니다.”

 

‘좋은 분이 주는 것은 다 좋습니다’, 참 기막힌 고백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신기하게도 좋은 분들이 주는 것은 다 좋음을 자주 체험합니다. 순간 하느님을 생각했습니다.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 바로 주님을 '그 좋으신 분'으로 고백합니다. 그러니 '그 좋으신 주님'이 주시는 것은 모두가 다 좋다는 결론입니다.

 

지금까지 주님께서 주신 것들도 다 좋았고, 지금 주시는 것도 다 좋으며, 앞으로 주실 것도 다 좋으리라는 믿음입니다. 참 좋으신 분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런 주님께 대한 신뢰의 믿음이라면 불평이나 불만은 물론, 절망, 원망, 실망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정말 몰라서 불평, 불만, 원망, 절망, 실망이지, 눈 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의 선물로 가득한 우리 삶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여기서 저절로 나오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입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하느님은 최선, 최상의 길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만약---했다면---’이란 가정법의 질문이 얼마나 부질없는 허망한 일인지 깨닫게 됩니다. 

 

어떤 때는 제가 다시 산다해도 이렇게 살 수 뿐이 없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정말 탓할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신뢰 부족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한다면 매사 하느님의 선물에 감사할 것이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기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좋은 것뿐 아니라 심지어는 병도 고통도 시련도 죽음도 좋으신 분의 좋은 선물로 받아들이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처지에서든 ‘하느님 찬미와 감사’가 우리 삶의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오늘 강론 제목을 ‘좋은 분이 주는 것은 다 좋다-하느님의 선물-’로 정했습니다. 욥이 모든 것을 다 잃은 '무無의 현장'에서 바친 감동적 고백도 기억할 것입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이 모든 불행한 일을 당하고도 욥은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어제 수녀님과의 대화로 이런 묵상을 전개하면서 저는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예수님과 예레미야 예언자를 생각했습니다. 두 분 모두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던 분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분분한 견해들로 분열된 모습을 보여 줍니다. 사건의 발단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서 시작됩니다. 그대로 우리를 미사에 초대한 주님의 말씀같습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7,37ㄴ).

 

이에 대한 반응으로 “저분은 참으로 그 예언자시다.” 또는 “저분은 메시아시다.” 옳게 고백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선입견으로 애당초 거부하는 무지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몇몇은 예수님을 잡으려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너무나 당당히 확신에 넘쳐 말씀하시는, 또 하느님과 하나되어 온갖 좋은 것을 주시는 좋으신 주님을 손댈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참 좋으신 예수님을 알아 본 경비병은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고백했고, 니코데모는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난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의를 제기하며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두둔하고 변호합니다. 둘 다 예수님이 참 좋으신 분임을 깨달았음이 분명합니다.

 

오늘 제1독서 예레미야서는 예레미야의 네 번째 고백을 다룹니다. 얼마나 주님과 친밀한 신뢰의 관계에 있는 예레미야 예언자인지 잘 드러납니다. 참 좋으신 분 주님께 대한 절대적 신뢰를 반영합니다. 주님께 대한 간절한 호소뿐, 원망이나 실망의 기색은 추호도 없습니다. 자신의 온갖 것을 정의롭게 판단하시는 주님께 맡깁니다.

 

“정의롭게 판단하시고 마음과 속을 떠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참 좋으신 분 주님이 주시는 것은 다 좋습니다. 참 좋으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주님의 처분을 기다리는 예레미야의 주님께 대한 절대적 신뢰가 감동적입니다. 참으로 탓할 것은 주님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우리의 신뢰 부족임을 깨닫습니다. 참 좋으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참 좋으신 당신 전부를 선물로 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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