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닮의 여정, 봉헌의 여정 -사랑, 순종, 찬미-2019.5.5.부활 제3주일 생명주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May 0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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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5.5.부활 제3주일 생명주일

 사도5,27ㄴ-32.40ㄴ-41 묵시5,11-14 요한21,1-19

 

 

 

예닮의 여정, 봉헌의 여정

-사랑, 순종, 찬미-

 

 

 

오늘 강론 제목중, “예닮의 여정”이란 말마디가 특이합니다만 예쁩니다. 예수님 닮기를 줄인 말인 예닮이란 어감이나 뜻도 좋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예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으라’, ‘나를 사랑하라’ 하지 않고, 오늘 복음 말미에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나를 따라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비로소 예수님을 닮아 예닮의 여정입니다. 예닮의 여정은 봉헌의 여정으로 직결됨을 봅니다. ‘예닮’ 못지 않게 아름답고 거룩한 말마디가 ‘봉헌’입니다.

 

어떻게 예닮의 여정, 봉헌의 여정을 시종일관, 초지일관 잘 살 수 있을까요? 세가지 수행에 충실할 때입니다. 사랑, 순종, 찬미의 수행입니다. 이런면에서 우리 수도자는 수행자라 할 수 있습니다. 제 좋아하는 말마디 수행자입니다. 수도자답게는 그대로 수행자답게로 직결됩니다.

 

어찌보면 우리 예닮의 여정은 사랑의 여정, 순종의 여정, 찬미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면서 영원한 도반이신 예수님과 우정도 깊어가면서 우리의 사랑도, 순종도, 찬미도 깊어져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사랑의 수행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참 보물인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실 때 저절로 자발적 가난이요 청빈의 가난을 사랑하게 됩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사랑입니다. 만병통치약이 사랑이요 만병의 근원이 사랑결핍입니다. 사랑은 삶의 의미이자 삶의 전부라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사랑있을 때 충만한 인생이지만 사랑빠지면 허무한 인생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바로 사랑의 이중계명입니다. 예수님 사랑이 바로 하느님 사랑에 직결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저절로 파스카의 예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그물 가득 고기를 잡아 올렸을 때 “주님이십니다.” 알아본 사람은 예수님께 사랑을 받던 애제자였습니다. 누구보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고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즉시 예수님을 알아 챈 것입니다.

 

사랑할 때 알고 아는 만큼 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알아갈 때 주님을 닮고 나를 알게 되어 참 행복에 이르고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사랑하여 알아가는 평생공부보다 더 중요한 공부는 없습니다. 주님을 알고 나를 알아갈수록 지혜와 자비, 온유와 겸손입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직접적 대화로 이뤄집니다. 세 번이나 거푸 묻는 물음은 동일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세 번 사랑을 확인한 후 당부 말씀도 동일합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수시로 자문하면서 주님께 대한 사랑을 점검해야 되겠습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진정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양들을 돌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이 이웃사랑을 통해 표현되고 검증되듯이 예수님 사랑도 주님의 양들을 돌보는 사랑으로 표현되고 검증됩니다. 베드로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정말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 형제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신 후 베드로에 대한 말씀 역시 우리 모두에 해당됩니다.

 

“나를 따라라.”

 

막연한 따름이 아니라 당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돌보고 섬기는 사랑으로 당신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일상의 모든 수행이 주님을 따르는 방편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순종의 수행입니다.

사랑의 순종이요 순종의 수행입니다. 삶은 순종입니다. 저는 순명보다 순종이란 어휘를 선호합니다. 예닮의 여정은 그대로 순종의 여정입니다. 순종의 여정을 통해 예수님을 점차 닮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복음에서 사랑을 착안했다면 오늘 사도행전 제1독서에서 착안한 순종입니다. 무엇보다 주님께 대한 순종입니다. 이래야 삶의 중심과 질서가 잡힙니다. 주님께 대한 우선적 순종에 항구할 때 일관성있는 삶에 건강한 영혼입니다. 대사제의 심문에 대한 베드로와 사도들의 답변이 참 통쾌합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 마땅합니다.---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신 성령도 증인이십니다.”

 

하느님께 순종할 때 성령도 받습니다. 사도들은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앞에서 물러나옵니다. 이런 기쁨도 바로 순종의 열매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깊은 내적 평화와 기쁨도, 자유도 하느님께 순종할 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으로 응답하여 배 오른쪽에 그물을 던졌을 때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순종의 믿음이요 사랑의 순종임을 깨닫습니다. 영적성숙의 잣대 역시 순종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순종의 수행입니다.

 

셋째, 찬미의 수행입니다.

끊임없는 사랑의 주님 찬미가 마음과 몸을 정결하게 하고 정결을 사랑하게 합니다. 사랑의 순종이듯 사랑의 찬미입니다. 봉헌 수도생활에서 하느님 찬미의 기쁨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 찬미의 사람들이 바로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하느님 찬미의 기쁨으로, 재미로, 맛으로 살아가는 수도자들입니다. 봉헌수도생활의 참행복도 하느님 찬미에 있습니다. 

 

바로 오늘 제2독서 요한 묵시록에서 착안한 ‘찬미’입니다. 요한에 환시중에 본 천상 찬미의 모습이 참 장관입니다. 어좌와 생물들과 원로들을 에워싼 수백만 수억만의 천사들이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하늘의 천사들과 땅의 피조물이 화답하여 하느님과 파스카 어린양 예수님을 찬미합니다.

 

“살해된 어린양은 권능과 지혜와 힘과 영예와 영광과 찬미를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에 곧장 화답하는 땅위와 땅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피조물과 만물입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과 어린양께 찬미와 영예와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생물은 “아멘!”하고 화답하고 원로들은 엎드려 경배합니다. 참 아름다운 찬미와 경배의 모습입니다. 새삼 거룩하고 아름다운 찬미와 감사의 교회전례의 역할이 얼마나 지대한지 깨닫습니다. 

 

우리 삶은 예닮의 여정이자 봉헌의 여정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면서 하느님을 닮은 참 내가 되어 가는 우리들입니다. 새삼 사랑의 수행들의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 수행이요, 사랑의 수행을 통한 마음의 순수입니다. 

 

죄가 없어서 가 아니라 사랑할수록 마음의 순수와 자유입니다. 참으로 순종과 찬미의 수행은 물론 모든 수행들이 우리를 순수하고 자유롭게 합니다. 마음의 순수와 자유가 최종 목표는 아닙니다. 바로 섬김의 봉사가, 사랑 실천이 뒤따라야 비로소 예닮 여정의 완성입니다. 회개의 메타노니아에 이어 친교의 코이노니아 그리고 봉사의 디아코니아로 매듭지어 지는 신자 생활과 일맥상통합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사랑의 궁극 목표로 향해야 하는 마음의 순수와 자유입니다. 사실 이런 섬김의 사랑 실천에 항구할 때 누리는 마음의 순수요 자유입니다. 

 

5월은 성모성월입니다. 예닮의 여정에 빛나는 모범이 바로 마리아 성모님이십니다. 늘 아드님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 예수님을 닮았던 성모님이십니다. 또 5월 첫주일은 생명주일입니다. 새삼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생명충만한 삶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예닮의 여정에, 사랑과 순종, 찬미의 수행에 항구하고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평생화두처럼 지니고 살아야 할 주님의 물음이자 명령입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나를 따라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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