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아름다운 영혼들 -적극적 사랑의 비폭력적非暴力的 저항抵抗의 사람들-2019.6.17.연중 제11주일 월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un 17,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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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6.17.연중 제11주일 월요일                                                                         2코린6,1-10 마태5,38-42

 

 

 

참 아름다운 영혼들

-적극적 사랑의 비폭력적非暴力的 저항抵抗의 사람들-

 

 

 

저에게 매일 밤 2시부터 4시까지 시간은 하느님을 공부하는 시간이요, 묵상하는 시간이요, 기도하는 시간이요, 회개하는 시간이요, 강론 쓰는 시간입니다. 한마디로 주님을 만나 겸손을 배우는, 겸손의 수행시간입니다. 그대로 구원의 시간입니다. 예전에는 강론을 머리로 썼지만 지금은 엉덩이로 씁니다. 예전에는 강론을 썼지만 지금은 강론을 조각합니다.  

 

구원은 바로 앞에 있습니다. 함께 있는 것이, 함께 사는 것이 구원입니다. 하느님이 선물하신 함께 사는 이들입니다. 이웃과 함께, 자연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사람들, 아름다운 자연들입니다. 하느님도 우리와 늘 함께 사는 아름다운 임마누엘 하느님입니다. 어제의 새삼스런 깨달음입니다. 평범해 보이는 것이 놀라운 새삼스러운 깨달음으로 마음에 와 닿을 때가 있습니다. 눈만 열리면 곳곳에 구원의 스승들입니다.

 

늘 때되면 그 자리에 무럭무럭 자라는 열매들도 참 고맙고 신기합니다. 수도원에는 늘 이때는 배적과에 이어 배봉지 싸는 일이 펼쳐집니다. 예나 다름없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배 열매들 보아 오기가 32년 매해 똑같이 반복되는 평범한 사실이 놀라운 기적이요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올해는 매실도 풍년입니다. 잘 자라는 굵은 열매들이 다닥다닥 달려있고 어제는 미사후 1차 수확한 매실을 판매했습니다. 아침 강론을 준비하던중 두런 거리는 소리가 들려 수도원 앞뜰에 내려 가 봤더니 두 수도형제가 매실 판매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리에서 묵묵히 소임에 충실하고 있는 모습이 참 아름답고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구원은 바로 앞에 있습니다. 얼른 사진에 담았습니다. 때로 피곤할 때 공동체 형제들 안에 그냥 말없이 머물러 듣고 바라보는 것도 구원임을, 그냥 함께 하는 것이 구원임을 어제 공동체 휴게 시간에 깨달았습니다. 예전 써 놨던 글도 생각납니다.

 

-어!/땅도 하늘이네/구원은 바로 앞에 있네

 뒤뜰 마당/가득 떠오른/샛노란 별무리/민들레 꽃들!

 땅에서도/하늘의 별처럼/살 수 있겠네-2001.4.16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아가는, 늘 거기 그 자리에서 정주하는 아름다운 우리 수도형제들입니다. 하나하나가 하느님 보내주신 귀한 선물들입니다. 성인들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습니다. 얼마전 갑작스럽게 오랜 만에 수도원에 들렸다 고백성사차 집무실에 들어오던 한 수녀님의 말도 잊지 못합니다.

 

“신부님, 그대로 여기 계셔 주셔서 고맙습니다!”

 

여전히, 한결같이 정주하는 삶이 이웃에겐 구원이 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이런 여전한, 한결같은 이들이 참으로 유연하고 겸손하고 강한 이들입니다. 결국 함께 정주하는 일은 비움의 수련, 겸손의 수련에 해당됩니다. 내적으로 깊어지고 넓어지는 비움의 여정, 겸손의 여정이 정주의 삶입니다.

 

늘 새롭게 시작하는 하루여야 합니다. 바오로의 말씀처럼 오늘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요, 오늘 지금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오랜동안 정주하다 보니 하루하루가 구원의 하루임을 깨닫습니다. 마음에 보복심, 앙갚음, 증오, 미움, 분노를 담아두고 정주할 수 없습니다. 매 수요일 끝기도 때마다 독서 말씀 듣기가 32년째 인데 들을 때 마다 새롭습니다.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질 때까지 화를 풀지 않으면 안됩니다. 악마에게 발붙일 기회를 주지 마십시오.”(에페4,26-27).

 

절대 부정적인 감정의 찌거기들 담아 두고 정주생활 못합니다. 무지의 소산이요 악마의 유혹들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공동체 형제들 앞에서 다 털어내야 삽니다. 이래야 영적탄력의 손상도 없고 영육의 건강입니다. 

 

오늘 말씀도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무지한 이들이 보복심이나 원한을 품지 정말 지혜롭고 자비로운 이들은 유혹으로 여겨 지체없이 비워버립니다. 이래야 정주생활에 항구할 수 있습니다. 살아가야 할 오늘 지금 여기의 일들도 가득한 데 이런 일로 에너지를 소모한다면 정말 무지의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기만으로도 너무 짧은 인생입니다.

 

복음 소주제가 공동번역은 ‘보복하지 마라’인데 새번역은 ‘폭력을 포기하여라’입니다. 두 주제 다 적절합니다. 보복하지 말아야, 폭력을 행사하지 않아야 보복의 악순환, 폭력의 악순환이란 악마의 유혹에서 해방의 구원입니다. 정말 무서운 것이 보복의, 폭력의 악순환의 유혹입니다. 

 

피동적 비겁한 겁많은 무저항이 아니라 적극적 사랑의 비폭력적 저항입니다. 정말 강하고 용기있는 부드러운 이들입니다. 예수님이 그러했고 성인들이 그러했고 금세기의 인도의 성자 간디가, 미국의 마르틴 킹 목사가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런 악순환을 끊어 버리는 참 적절한 처방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빰마져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이런 적극적 사랑의 비폭력적 저항 행위가 악을 무장해제시킵니다. 싸우다 닮습니다. 악인에 맞서다 악인을 닮아 괴물이 될 수 있습니다. 악의 힘만 증대시킬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적극적 사랑의 비폭력적 저항 영성이 항구한 인내의 정주의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런 이들이 진정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어떤 환경에서든 늘 그렇게 한결같이 하느님의 일꾼으로 살아갑니다. 바오로 일행이 그 모범입니다. 길다 싶지만 제 1독서 후반부 내용이 좋고 중요하여 공부하는 마음으로 다 인용합니다.

 

“곧 많이 견디어 내고, 환난과 재난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매질과 옥살이와 폭동을 겪으면서도 그렇게 합니다. 또 수고와 밤샘과 단식으로, 순수와 지식과 인내와 호의와 성령과 거짓 없는 사랑으로, 진리의 말씀과 하느님의 힘으로 그렇게 합니다. 오른 손과 왼손에 외로움의 무기를 들고, 영광을 받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중상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우리는 늘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진실합니다.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자 같이 보이지만 실은 인정을 받습니다. 죽어 가는 자같이 보이지만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벌을 받는 자같이 보이지만 죽임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슬퍼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늘 기뻐합니다. 가난한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합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대로 참 한결같이 초연한 이탈의, 참으로 자유롭고 진실한, 참으로 주님께 인정받고 사랑받는, 참으로 강하고 유연한, 주님의 제자,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 주님의 일꾼, 주님의 수행자의 모습입니다. 이런 대각大覺의 깨달은 자에게는 천하무적입니다. 악마의 유혹이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비움의 절정, 겸손의 절정, 주님과 일치의 절정을 보여주는 참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비움의 여정, 겸손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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