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구원이자 희망이신 예수 그리스도 -주님과의 늘 새로운 만남-2019.7.3. 수요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ul 03,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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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7.3. 수요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에페2,19-22 요한20,24-29

 

 

 

우리의 구원이자 희망이신 예수 그리스도

-주님과의 늘 새로운 만남-

 

 

 

오늘은 성 토마스 사도 축일입니다. 매일 미사전례의 은총이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바꿔줍니다. 하루하루 새롭게 시작하게 합니다. 오늘도 이런저런 묵상들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정확히 19년전 2000년 7월25일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미사때, 제가 이 자리에서 한 강론 서두가 생각납니다.

 

“하느님은 자유이십니다. 하느님을 찾는 우리의 수도 여정은 자유 추구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사람 누구에게나 마음 깊이에는 참으로 자유를 향한 열망이 있습니다. 자유로울 때 행복합니다. 자유롭게 하는 사랑이 참 사랑입니다. 자유로울 때 인격적 성숙입니다.”

 

요지로 시작된 강론입니다. 참으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날 때 시공을 초월하여 늘 새롭고 자유로운 ‘영원한 현재’의 삶입니다. 저에겐 19년전이나 지금이나 ‘영원한 현재’처럼 느껴집니다. 어제의 몇가지 깨달음도 잊지 못합니다. 수녀님들과의 저녁 식탁에서 옆에 있는 수녀님이 ‘산이 커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수녀님의 마음이 커진 것입니다.”

 

제가 드린 덕담이지만 사실입니다. 날마다 주님을 만나 새로워질 때 깊어지고 넓어지는, 내적으로 커지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진정 우리의 희망이자 영적 삶의 목표입니다. 

 

그러고 보니 여기 ‘무아의 집’이 없었다면 배경의 태령산은 얼마나 쓸쓸하고 외로웠을까, 태령산이 있어 무아의 집이 축복이 아니라 무아의 집과 수녀님들이 있어 태령산의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가슴에 품고 바라볼 무아의 집과 수녀님들이 있기에 행복한 배경의 태령산입니다.

 

똑같은 이치가 요셉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에도 적용됩니다. 요셉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의 축복에 고마웠지만 이젠 반대로 요셉수도원이 있어 불암산이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바라보고 품을 요셉수도원이 없었다면 참 쓸쓸하고 허전했을 불암산입니다. 

 

역시 산처럼, 우리 삶의 중심에 계신 주님의 배경이 되어 주님을 품고 바라보고 지켜볼 수 있는 우리들이기에 충만한 기쁨에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님은 우리 삶의 중심이자 의미요, 우리 삶의 희망이자 기쁨입니다. 

 

또 두가지 깨달음도 생각납니다. 어제 뒤늦게 복음을 묵상하며, 즉 호수의 풍랑중에 주님을 만난 배안의 제자공동체를 묵상하며 떠오른 깨달음입니다.

 

“호수의 풍랑에, 외관의 유혹에 반응하지도, 흔들리지도, 휘말리지도 말자. 가만히 기다리자. 마음의 호수, 공동체의 호수, 중심의 깊이에는 고요와 평화, 신뢰와 사랑의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참으로 우리 삶의 중심 깊이에 계신 주님을 믿고 만날 때 참 행복이요 평화임을 깨닫습니다. 또 하나는 어제 수녀원 피정지도차 수시간 준비하면서의 깨달음도 저에겐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19년전 올 때는 참 간편한 준비였는데 19년 후인 지금에는 참 준비할 것도 많아졌습니다.

 

“아, 젊을 때 죽어 아버지의 집에 귀가한다면 준비할 것도 적겠지만 살아갈수록 준비할 일도 많아지겠다. 아, 살수록 부지런해야 죽음의 귀가준비도 문제가 없겠다. 이래서 살아갈수록 힘드는 것이구나. 하여 분도 성인의 말씀처럼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사는 것이다. 늘 주님을 새롭게 만나 새날을 사는 거다.”

 

또 어제 문대통령의 국무위원들 앞에서 강조한 ‘상상력’에 대한 기사 내용에 공감해 나눕니다. 문 대통령은 “세계를 감동시킨 북미 정상 간의 판문점 회동은 트럼프 대통령의 SNS를 통한 파격적인 제안과 김정은 위원장의 과감한 호응으로 이루어졌다. 그 파격적인 제안과 과감한 호응은 상식을 뛰어넘는 놀라운 상상력의 산물이다. 기존의 외교문법 속에서 생각하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 상상력이 세계를 놀라게 했고, 감동시켰으며, 역사를 진전시킬 힘을 만들어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다음 기사에도 공감했습니다. -“문 대통령은 지난 2017년 5월 취임한 이후 자신의 지론인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선순환'을 바탕으로 끈질기게 북미대화를 추동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런 점에서 모 국회의원이 지난 6월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트럼프는 대단하고, 김정은은 대담하며, 문 대통령은 끈질기다"라고 평가한 것은 지극히 온당하다.- 

 

대단하고 대담하고 끈질길 수 있음도 상상력의 은총이 있어 가능합니다. 파스카의 주님은 상상력의 원천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셔요. 파스카의 주님의 행동은 완전히 파격적이며 상상을 초월합니다. 주님이 임하실 때 벽은 문으로 변합니다. 문이 완전히 닫힌 폐쇠된 공간 한가운데에 서시며 평화를 선사하신 주님께서는 미사에 참석한 우리에게도 당신 평화를 선사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그러니 대단하고 대담하고 끈질기로는 파스카의 주님만한 분이 없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주님을 만난 성 토마스 사도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고백은 얼마나 놀라운지요! 완전히 자기감옥에서 해방되어 상상력이 활짝 꽃피어 났을 토마스의 내면입니다. 이어 주님은 토마스는 물론 우리 모두 당신을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믿음의 상상력을 촉구하십니다. 참된 믿음은 상상력의 원천입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만남중의 만남이 살아 계신 파스카의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상상력의 원천이자 진정한 내적성장과 성숙의 원천이 되시는 주님이십니다. 바로 이 점을 바오로 사도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와 치유, 기쁨과 평화요, 성장, 성숙하는 공동체요 개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요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다음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이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모퉁이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우리 삶의 모두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끊임없이 성장, 성숙하는 영원한 현재진행형의 공동체요 개인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참 좋은 믿음과 더불어 상상력을 선물하시며, 당신 중심의 공동체와 더불어 우리 각자의 내적성장과 성숙도 이뤄주십니다. 저절로 화답송 시편의 고백이 흘러 나옵니다.

 

“우리 위한 주님 사랑 굳건하여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여라.”(시편117,2ㄱㄴ).

 

탓할 것은 주님도 환경도 아닌 주님 향한 우리의 부족한 믿음, 희망, 사랑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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