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카의 삶, 늘 새로운 시작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2019.7.6.연중 제13주간 토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ul 06,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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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7.6.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창세27,1-5.15-29 마태9,14-17

 

 

 

파스카의 삶, 늘 새로운 시작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제가 좋아하는 말마디를 강론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파스카의 삶, 늘 새로운 시작-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바로 강론 제목입니다. 파스카 영성과도 일맥상통합니다. 과거는 이미 지났고 미래는 오지 않았고 우리가 확실히 살 수 있는 것은 현재의 오늘입니다. 오늘의 현재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 사는 것 바로 여기에 행복도 있습니다.

 

믿는 이들은 모두 '주님의 전사'입니다. 제대가 없는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입니다. 그러니 늘 하루하루의 영적 전투에 죽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믿는 이들은 모두 '주님의 학인'입니다.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영원한 학생입니다. 그러니 죽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열린 겸손한 마음으로 배워야 할 것입니다.

 

젊음은 '나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 '마음'에 있습니다. 아무리 세월 흘러 나이들어도 정신이, 마음이 늘 새로우면 영원한 젊음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했고 성인들이 그러했습니다. 제 좋아하는 ‘산과 강’이란 자작시도 이런 제 생각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밖으로는 산/안으로는 강

천년만년/임 기다리는 산/천년만년/임 향해 흐르는 강”-

 

산과 강의 영성으로 살 때 늘 새로운 시작일 수 있습니다. 밖으로는 한결같은 산같은 정주의 삶이지만 안으로는 끊임없이 하느님 향해 맑게 흐르는 내적 여정의 삶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자작 좌우명 시 셋째 연도 이와 맥을 같이 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緩慢)하게 또 격류(激流)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참으로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뜻합니다. 늘 내 뜻이 아닌 하느님 뜻을 생각하며 실천하는 하느님 중심의 삶을 뜻합니다. 삶은 끊임없이 새롭게 배워가야 하는 배움의 여정이요, 하느님을 찾는 여정입니다. 그러니 ‘배움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갈망(love of learning and desire for God)’은 구도자의 기본적 자질이요 이래야 열정과 순수의 수행자로 살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묵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와서 우리와 바라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는가 묻습니다. 참 구태의연한 태도요 물음입니다. 단식 자체가 그 무슨 큰 수행이나 되는 것처럼 트집을 잡습니다. 정말 진짜 수행은 사랑의 수행뿐인데 말입니다. 절대적인 것은 사랑뿐이고 단식을 비롯한 모든 수행은 상대적일 뿐입니다. 하여 분별의 잣대는 사랑이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고가 참 유연하고 개방적입니다. 단식을 상대화 시킵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함께 있는 동안은 슬퍼할 수 없기에 단식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 주님과 함께 축제인생을 맘껏 즐기고 주님이신 신랑에 빼앗길 날 그때 가서 단식해도 된다는, 즉 아무 때나 단식이 아니라 단식의 때에 단식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식을 하더라도 얼굴을 씻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이웃에 숨겨진 감쪽같은 단식을 권하셨습니다. 우리의 수행들 역시 겸손히 숨겨질 때 빛이 나는 법입니다.

 

예전 장상의 유머도 잊지 못합니다. “먹고 겸손한 것이 안 먹고 교만한 것보다 낫다.” 자기만족의 교만한 단식보다는 아예 먹고 겸손한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복음 말씀도 핵심을 잡고 있습니다. 새롭고 깊습니다. 사고의 전환, 발상의 전환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낡고 빛바랜 구태의연한 사고를 늘 새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늘 깨어 배울 수 있는 새 부대의 정신, 마음, 사고를 지니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늘 새 포도주의 진리를 담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나 자주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바리사이들이나 율사들은 구태의연하기가 흡사 복음의 헌 옷과 같고 헌 가죽부대와 같습니다. 

 

바로 우리의 정신, 마음, 사고 상태를 묻는 것입니다. 늘 새로운 진리를, 현실을 수용할 수 있는 새 부대의 정신을, 마음을, 사고를 지니고 있는가 묻습니다. 아무리 세월 흘러 나이 들어도 늘 맑게 흐르는 정신으로, 마음으로 살아 갈 때 늘 새 부대의 정신이요 마음일 것입니다. 하여 복음의 결론은 그대로 예수님의 지혜로운 삶을 반영하며 우리의 각성을 촉구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창세기의 이사악과 그의 아내 레베카가 참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이사악의 사고는 구태의연합니다. 장자인 에사우가 당연히 자기 뒤를 이을 것이라 확신하고 축복을 주려 합니다. 그러나 레베카의 사고는 하느님 중심적이라 열려있고 유연합니다. 이미 에사우와 야곱 쌍둥이가 태중에 있을 때 주님의 예언을 기억한 레베카임이 분명합니다.

 

“너의 배 속에는 두 민족이 들어 있다. 두 겨레가 네 몸에서 나와 갈라지리라. 한 겨레가 다른 겨레보다 강하고,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창세25,23).

 

이어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에사우는 야곱이 준 빵과 불콩죽을 먹고 경솔하게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맏아들의 권리를 야곱에게 팔아 넘겼습니다. 이런 내막을 안 레베카의 마음은 하느님처럼 야곱에게 기울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 중심의 삶과 사고를 지닐 때 늘 열린 새 부대의 마음에 올바른 분별의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물론 야곱과 레베카가 공모하여 에사우를 속인 행위가 참으로 비열합니다만 그 안에도 하느님의 깊은 섭리가 있음을 봅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하여 다음과 같은 속담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굽은 줄들 위에다도 똑바로 쓸 수 있다(God can write straight with crooked lines)”-

 

우리 믿는 이들은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요, 영원히 배워야 하는 주님의 학인입니다. 참으로 늘 깨어 배움에 대한 지칠줄 모른 사랑을, 하느님을 찾는 지칠줄 모르는 갈망을 지닐 때 늘 새 부대의 정신이요 마음일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새 부대의 마음안에 당신 새 포도주의 생명과 사랑을 가득 담아 주시어 오늘도 새 하늘과 새 땅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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