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어디서나 일하시는 하느님 -하늘 나라의 실현-2019.7.10.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ul 1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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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7.10.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창세41,55-57;42,5-7ㄴ.17-24ㄱ 마태10.1-7

 

 

 

언제 어디서나 일하시는 하느님

-하늘 나라의 실현-

 

 

 

이건 큰 비밀 사유도 아니기 때문에 공개합니다. 엊그제와 어제 저는 여기 피정중인 수녀님들과 상주하는 수녀님들에게 고백성사를 드렸습니다. 제가 고백성사 보속으로는 늘 말씀 처방전을 써드리며 일정 기간 말씀 약을 복용할 것을 권했지만 이 번은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다른 보속을 드렸습니다. 정말 이런 보속은 처음이지만 흡족했습니다.

 

“오늘 지금부터 피정 마치는 내일 까지 1.하느님과 공동체 형제들과 나를 사랑하고, 2.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고 평화롭게 행복하게 지내십시오. 이렇게 피정 마칠 때까지 지내는 것이 보속입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지내신다면 더할 나위없이 좋겠습니다.”

 

요지의 보속이었습니다. 강론을 들으시면서 다시 한 번 보속 내용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죄책감에 아파하는 것보다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긍정적이며 지혜로운 최선의 처방입니다. 죄가 없어서가 아닌 사랑할수록 마음의 순결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최상의 보속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공동생활에 충실히 정진하는 것입니다.

 

마침 어제 늘 저에게 고백성사를 보는 열심하고 성실한 교구 사제 한분이 멀리서 시간을 내어 고백성사를 보러 왔습니다. 할 일이 태산같이 많은 데 마음이 죄에 매여 무거워 일이 안되기에 불야불야 왔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제들이 가장 힘든 경우는 죄책감 중에 강론 준비 및 미사봉헌할 때일 것입니다. 참으로 깨끗항 삶이 받쳐주지 않으면 강론 준비는 물론 제대 앞에 서서 미사봉헌하기가 참 두렵고 힘들기 때문입니다. 하여 오후 고백성사를 보러 온 교구 사제에게도 위와 비슷한 보속을 드렸습니다. 단 보속기간만은 이번 주일까지로 했습니다. 

 

위와 같은 보속을 드리며 참으로 흡족했습니다. 어제의 과거는 지나갔고 내일의 미래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사랑하며, 감사하며, 기뻐하며, 평화롭게 행복하게 사는 것이 참으로 현명하고 중요한 일이며 하느님도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사랑은 비움입니다. 사랑은 하느님이 일하시도록 자리를, 공간을 마련해 드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언제 어디서나 일하십니다. 졸지도 잠들지도 않으시고 늘 깨어 일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세상 모두가, 모든 시간이 하느님 수중에 있습니다. 이런 하느님을 위해 시간을, 공간을 내드리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우리는 성령의 궁전이 되고 주님의 거처가 됩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피정 강의전 잠시 실습하는 깨어 침묵중에 주님 안에 머무는 명상기도 역시 하느님을 위해 자리를 마련해 드리는 비움의 기도, 사랑의 기도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보면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창세기 제1독서 말씀의 배치가 참 절묘하고 고맙습니다. 역사의 무대에서 주인공들이 계속 바뀝니다. 물론 인류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총감독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아브라함, 이사악에 이어 어제까지 주인공으로 맹활약하던 야곱은 퇴장하고 그의 아들 요셉의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하느님의 때가 되어 잘 떠나는 퇴장보다 아름다운 모습은 없습니다. 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홀가분하게 미련없이 떠나 자리를 마련해 주는 사랑이 참으로 거룩한 사랑입니다. 삶의 무대에서 배역이 끝났는데도 떠나지 못하고 얼쩡거리면 참 보기 민망할 것입니다. 이래서 떠날 때 잘 떠나게 해주십사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야곱에 이어지는 요셉의 삶 역시 하나의 살아있는 성경책입니다. 얼마전 강론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우리 각자의 고유한 인생 역시 미완未完의 살아있는 성경책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단한 내 삶의 성경책을, 역사를 렉시오 디비나 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이 일하시도록 자리를 마련해 드리는 일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전화위복입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형제들의 악행으로 이집트에 팔려간 요셉이 하느님 구원 섭리의 도구가 됩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시야는 참 멀고도 넑고도 깊습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 안에, 회개로 깨끗해지 영혼 안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다음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나도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다.”

 

형제들에 대한 요셉의 고백이 그의 삶을 압축 요약합니다. 이집트에서의 파란만장했던 삶중에도 늘 하느님을 경외하며 모시고 살았던 하느님의 사람 요셉이었습니다. 이어지는 형제들의 죄을 뉘우치는 모습에 요셉은 물러가 울었다 하니 형제들간의 내적 화해와 더불어 하느님께서 일하실 수 있는 자리가 한껏 마련된 것입니다.

 

“그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죗값을 받는 것이 틀림없어. 그 애가 우리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할 때 우리는 그 고통을 보면서도 들어 주지 않았지. 그래서 이제 이런 괴로움이 우리에게 닥친 거야.”

 

이런 회개를 통해 마련되는 하느님의 자리입니다. 하느님은 회개한 깨끗한 영혼들의 내적 공간에서 일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일하시도록 자리를 마련해 드리는 끊임없는 회개가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누구보다 이런 영적 사정에 정통하신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일하시기 좋도록 열두 제자를 선택하여 준비시킵니다. 이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십니다. 하느님은 이처럼 사랑으로 텅 빈 자리를 마련해 놓은 제자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똑같은 주님께서 오늘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똑같은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들을 쫓아내시고 만나는 이들에게 치유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늘 나라는 멀리 밖에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일하시도록 자리를 마련해 드린 오늘 여기 우리가 바로 하늘 나라의 실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를 치유하시고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성령 충만한 하늘 나라로 파견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늘 나라는 멀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섭리의 도구가 된 우리 하나하나가 하늘 나라입니다. 주님 파스카의 신비를, 기쁨을 살아가는 우리를 통해 끊임없이 확장되는 하늘 나라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두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5).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주님께 바라는 사람!”(시편34,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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