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7.11.목요일. 유럽의 수호자, 서방 수도생활의 아버지, 사부 성 베네딕도 아빠스(480-547) 대축일
창세44,18-21.23ㄴ-29;45,1-5 마태10,7-15
환대의 영성
-환대의 하느님, 환대의 사랑, 환대의 기쁨-
오늘 7월11일, 성 베네딕도 아빠스 대축일은 저에겐 참 감회가 깊은 날입니다. 감사하는 마음 가득합니다. 그동안 장마철이라지만 비도 없었고 덥지도 않았고 어제 비로소 반가운 비가 내려 우리 마음을 촉촉이 적시니 흡사 하느님께서 피정을 마무리 짓는 은총의 비처럼 느껴졌습니다.
우선 하느님께 감사하고 저를 피정지도로 불러 주신 순교복자수녀회에 감사하는 마음 가득합니다. 하여 오늘 강론 제목은 이미 어제 아침 식사때 정했습니다.
“환대의 영성-환대의 하느님, 환대의 사랑, 환대의 기쁨-”
바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환대의 영성은 우리 베네딕도회 정주영성에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대표적 영성이며 전통적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영성이기도 합니다. 환대의 하느님이며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물론 성서의 사람들, 옛 사막의 수도자들, 교회의 사람들, 수도회의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닮아 한결같이 세상에 활짝 열린 환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7월11일 저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사부 성 베네딕도의 위업을 기리며 파공 대축일로 지냅니다. 성인은 67세를 사셨는데 저는 70세로 성인보다 3년을 더 살고 있는 중입니다. 바로 이날은 제가 요셉수도원에 부임한지 31주년(1988.7.11.)이 되는 날이며, 사제서품 30주년(1989.7.11.)이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문득 요셉수도원에 부임하기 전날 1988년 7월10일 밤부터 7월11일 새벽까지 장장 8시간 동안 왜관수도원 본원 성전에서 3천배를 바쳤던 기도가 생각납니다. 당시 제 심정은 창세기에서 하느님과 밤새 싸웠던 야곱의 처지와 흡사했습니다. 그리고 제 자작 좌우명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시詩대로 살다보니 만 31주년이 되었고 그 미사를 순교복자수녀회 수녀님들 피정 마치는 날 봉헌하니 만감이 교차하며 감사하는 마음 가득합니다. 31년 동안 살아오면서 제가 자주 되뇌었던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
이번 피정지도 시간은 저에게도 참 좋은 피정시간이자 휴식시간이, 공부하는 시간이기도 하였고, 무엇보다 하느님의 환대, 수녀원의 환대를 깊이 체험한 은혜로운 시간이었습니다. 환대의 결정적 표지는 환대의 만남에 이어지는 식사입니다. 사실 고백하기 쑥스럽습니다만 이렇게 하루 세끼 정성과 사랑이 가득 담긴 음식을 잘 먹어 보기는 생전 처음입니다.
결론은 우연은 없다는 것입니다. 환대의 하느님은 요셉수도원 부임 31주년을, 사제서품 30주년을 맞이하는 저를 위해 이처럼 좋은 자리를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무아의 집을 통해 마련해 주셨습니다. ‘무아無我의 집’은 그대로 ‘환대歡待의 집’이 되었습니다. 2000년 7월 첫 번 오기 시작하여 2019년 7월, 19년후 이렇듯 건강한 영육으로 오게 되었으니 이 또한 감사해야할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의 기적임이 분명합니다.
또 피정지도차 오던 날 하나의 깨달음을 다시 나눕니다. 19년전보다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다보니 참 이런저런 준비할 것이 많았습니다. 시간도 배로 걸렸습니다. 나이 들어갈수록 더 부지런해야 하고 죽음 준비도 미리미리 해놓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음에 임박해서 준비하면 너무 늦겠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충분히 시간을 두고 정리하여 요셉수도원을 출발하여 무아의 집에 도착하니 7월2일 오후 12시20분! 얼마나 마음 여유있고 넉넉하던지요. 피정지도에 앞서 기도도 하고 쉬기도 하고 준비도 하면서 지내니 얼마나 좋던지요. 죽음도 이처럼 준비되고 여유있는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같았으면 참 좋고 은혜롭겠다는 생각을 마음 깊이 새겼습니다.
무아의 집에 도착했을 때의 환대의 기쁨도 잊지 못합니다. 태령산, 무아의 집, 성모 동산의 성모님, 여기 올 때 마다 머물렀던 사제관, 사제관 동산의 부활하신 예수님, 또 상주 수녀님의 환영의 환대가 참 고마웠습니다. 환송보다 환영의 환대가 참 중요함을 깨달았습니다. 세상을 떠날 때 환송보다 천국에 이르렀을 때 환영나온 이들이 없다면 얼마나 쓸쓸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상에서 하루하루 잘 살아야 천상에서 무수한 성인성녀들의 환영의 환대임을 깨닫습니다.
좌우간 수녀님들이나 저나 하느님의, 수도공동체의 따뜻한 사랑의 환대의 분위기 중에 하늘 나라 체험의 은혜로운 피정기간을 지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환대의 영성이 주조를 이룹니다. 예나 이제나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하늘 나라 복음 선포의 선교는 우리 교회의 존재이유입니다.
선교없는 교회는 존재이유의 상실로 죽은 교회입니다. 형제들의 친교생활과 사도직의 선교생활은 늘 함께 합니다. 친교와 선교는 분리할 수 없는 한 실재의 양면입니다. 선교생활의 놀라운 주인공, 숨겨져 있는 겸손한 최고의 공로자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성령’이요 ‘환대의 무명의 신자들’입니다.
드러나게 활동하는 선교사들의 보이지 않는 인도자와 동반자가 주님의 성령이요, 파송된 주님의 제자들이 무소유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음도 곳곳의 선교지의 환대의 신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환대에 대한 최상의 보답은 평화입니다.
“너희가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어라.---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제자들이야 말로 주님 환대의 평화를 맘껏 누린 이들입니다. 우리 수도자들 역시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주님 환대의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은총의 사람들입니다. 도대체 내것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가 받은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는 삶을 살아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럽습니다.
우리를 환대하는 이웃에 줄 수 있는 최상, 최고의 선물은 주님의 평화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합니다. 환대의 사람들, 평화의 사람들에 대한 주님의 행복선언입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오늘 창세기의 주인공 요셉의 환대는 읽을 때마다 감동입니다. 형제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깊고 넓은 품이 그대로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너그럽고 자비로운 하느님의 닮을수록 환대의 사람, 평화의 사람이 됨을 깨닫습니다. 바로 창세기의 요셉이, 복음의 예수님과 제자들이,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 베네딕도가 참 좋은 환대의 본보기입니다. 참으로 해피엔드로 끝나는 다음 요셉의 겸손한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요셉의 따뜻한 환대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내가 요셉입니다!---나에게 가까이 오십시오.--- 내가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 그러나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보고 배웁니다. 환대의 생생한 모범이 요셉입니다. 하느님의 넓고 깊은 시야를, 마음을 닮은 요셉입니다. 하느님을 닮을수록 환대의 사람이 됨을 깨닫습니다. 환대의 사랑, 환대의 기쁨, 환대의 영성, 바로 하느님의 환대를 반영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환대하시고 당신을 마음 활짝 열고 환대하는 우리를 당신 평화로 가득 채워 주시어 우리 모두 환대의 사람, 평화의 사람으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