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믿음이 답이다-2019.7.15.월요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1217-1274) 기념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ul 1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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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7.15.월요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1217-1274) 기념일 

탈출1,8-14.22 마태10,34-11,1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믿음이 답이다-

 

 

 

오늘은 프란치스코회의 보물같은 성인, 성 보나벤투라 축일입니다. 당시 도미니코회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쌍벽을 이뤘던 대 영성가 성인입니다. 성 보나벤투라 성인은 만 57세 사셨으니 저는 성인보다 13년을 더 살고 있네요.

 

오늘은 잠시 세상 이야기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삽니다. 두렵고 무서운 적은, 개인이든 공동체든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습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아무리 작고 약해도 일치 단결해 있으면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내부의 분열이 참 무섭고 두렵습니다. 강하든 약하든 내부의 분열로 망한 개인이나 공동체들이 대부분입니다. 약해서 망한 것이 아니라 내부의 분열로 망했습니다. 나라도 그렇습니다. 내부의 분열에는 답이 없습니다. 누구도 도와 줄 수 없습니다. 그러니 개인이든 공동체든, 나라든 ‘내적 일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며칠 전에는 문득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바쁜 지도자는 누구일까?’ 생각하다가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문대통령이 생각났습니다. 84세의 고령인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나날의 일정은 정말 초인적입니다. 참 여유없이 힘들고 바쁜 삶중에도 전세계에 대한 자상한 관심과 매일 주옥같은 말씀과 웃음띤 얼굴을 보면 정말 살아있는 성인이요, 세계의 정신적 대통령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며칠전 교황님의 강론 주제도 생각납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깊은 바다의 고요와 같다.”(The peace of Jesus is like the calm of a deep sea)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인지요. 겉으로는 시끄럽고 어지럽지만 내부 깊이에는 주님의 깊은 평화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이 답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에 이어 가장 힘들고 바쁜 지도자가 한국의 문대통령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칭찬과 더불어 받는 비난과 수모는 얼마나 많은지요. 참 역동적이고 그러나 참 많은 크고 작은 무수한 내외적 도전에 직면해 있는 한국입니다. 혹자는 ‘미국이나 호주는 재미없는 천국이고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어제는 식탁대화중 "문대통령은 너무 착해서 문제다."라는 어느 형제의 말에 공감하면서 즉시 떠오른 것은 참으로 착할 때, 부족한 것은 하느님이 다 채워 주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사실 착함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지혜요 겸손입니다. 착할 때 부족한 것은 좋은 이웃이, 좋은 하느님이 도와 주십니다. 문대통령은 12일 오후 전남 무안을 찾아 ‘블루 이코노미 비전 선포식’ 연설을 하면서 사전 원고에 없던 “전남의 주민들이 이순신 장군과 함께 불과 열두척의 배로 나라를 지켜냈다”고 말했다 합니다. 요즘 한일간 갈등으로 겪는 내적 고독과 어려움을 표현한 듯 생각되었습니다. 어느 평자의 글도 잠시 인용합니다.

 

“한반도 평화문제는 미국이나 유럽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대체로 관심이 없고, 서방 언론들도 우리한테 별로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특히 미국의 주류 사회에는 우리의 우군이 없습니다. 있다면 한 사람 있는데, 트럼프죠. 문제는 그의 동기가 노벨평화상에 대한 욕심과 재선을 노린 계산이라는 거죠. 한편으로 잘 됐다는 생각도 들어요. 

 

이 기회를 좀더 근본적인 성찰의 시간으로 만들 수도 있으니까요. 돌아보면 촛불의 힘으로 등장한 문재인 정부가 약속대로 남북관계 개선에 적극 나섰고, 김위원장도 어차피 이대로는 갈 수 없으니까 호응을 하게 되었고 워싱턴 정가의 이방인인 트럼프도 일단 긍정적으로 나오면서 모처럼 절묘한 상황이 만들어지는 바람에 여기까지 왔죠. 그래서 1년 남북 정상이 세 번이나 만나고, 북미정상도 두 번 만났죠. 사실 이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에요.”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위기는 기회라 합니다. 한일관계가 복잡 난해하지만 분명한 것은 100년전의 한국이, 한반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절대 불행의 역사를 반복할 수 없습니다. 새롭게 비상할 수 있는 위기의 기회라 봅니다. 우리의 운명은 하느님의 보호와 우리의 인내와 지혜로 우리가 개척해야 합니다. 세상에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나라는 어디도 없습니다. 1차적 관심은 자국의 이익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새벽 언뜻 본 기사도 시사적이었습니다.

 

-‘현대사의 고비마다 거리의 미사로 민중이 갈 길을 앞서 걸었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돌이킬 수 없는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해 매주 월요일 미 대사관 앞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서 미사를 거행한다. 첫 미사는 15일 오후 7시다.‘-

 

한국은 축복받은 나라입니다. 아시아의 등불같은 나라입니다. 전국에는 얼마나 많은 성지가 있습니까? 전 국토가 역사박물관 같고 성지같은 하느님의 각별한 사랑과 보호를 받는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평화가 한반도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하며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어제로서 창세기 야곱과 요셉과 그 형제들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에로 끝나고 오늘부터는 탈출기입니다. 끝은 시작입니다. 걸출한 지도자들은 사라지고 파라오와 이집트인들의 압제하에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이스라엘 자손들입니다. 이집트인들은 모든 일을 혹독하게 시켜 그들의 삶을 쓰디쓰게 만들었다 합니다. 요셉같은 지도자는 없어도 하느님은 친히 축복의 약속대로 그들을 돌봐주시어 억압을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고 더욱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이처럼 친히 이집트인들의 압제하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돌봐주신 똑같은 하느님께서 우리 한국을, 한반도의 백성을 돌봐주신다는 믿음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의 각성과 기도, 그리고 정의와 평화의 사랑 실천이 참으로 절실한 때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도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만 참신한 충격으로 정신 번쩍 들게 합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바 거짓 평화입니다. 예수님은 거짓 평화가 아닌 참 평화를 주러 오셨습니다. 예수님 자체가 참 평화요 거짓과 진리를 가르는 칼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선악이, 진위가. 명암이 탄로되니 분열이지만 이는 참된 평화에 이르는 창조적 과정의 잠정적 분열입니다. 적당히 두루뭉실한 거짓 평화가 아닌 정화된 참 평화입니다. 

 

예수님은 이어 그 누구도 당신 보다 사랑하지 마라 하십니다. 노골적으로 미워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삶의 중심을 오로지 당신께 두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우선순위에 놓고 사랑할 때 모두에 대한 집착없는 초연한 눈밝은 사랑도 가능할 것입니다. 또 주님은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면서 제 본분의 책임에 충실하고 항구할 때 당신께 합당하다 하십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대인관계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선물같은 존재들이니 모두를 주님을 맞아들이는 환대의 자세로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작은 이들 하나하나 역시 ‘주님의 사람’으로 생각해 소중하게 대할 때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내안에 있고 답은 주님 안에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은 우리의 목자이시니 두려울 것 없습니다. 주님을 한결같이 믿을 때, 주님은 우리에게 인내와 지혜, 겸손을 선물하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한반도 땅과 사람들에게 참 평화와 더불어 일치를 선물하십니다.

 

“사냥꾼의 그물에서, 우리는 새처럼 벗어났네. 그물은 찢어지고, 우리는 벗어났네. 우리 구원은 주님 이름에 있네.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시네.”(시편124,7-8).

 

그대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과도 같은 화답송 시편 마지막 구절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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