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의 잣대는 사랑 -사랑은 율법의 완성-2019.7.19.연중 제15주간 금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ul 1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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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7.19.연중 제15주간 금요일                                                                    탈출11,10-12,14 마태12,1-8

 

 

 

분별의 잣대는 사랑

-사랑은 율법의 완성-

 

 

 

분별의 잣대는 율법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분별의 지혜, 분별의 사랑입니다. 모든 덕의 어머니가 분별력입니다. 지도자는 물론 모든 이들에게 참 필요한 분별력입니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우스개 말도 있듯이 분별력이 부족하면 파생되는 복잡한 일이 많습니다. 베네딕도 성인도 규칙서 “제64장 아빠스를 세움에 대하여”에서 아빠스의 분별력을 강조합니다.

 

“그는 자기의 명령에 있어서는 용의주도하고 깊이 생각할 것이다. 그 명령이 하느님께 관계되는 일이든 아니면 세속에 관계되는 일이든 분별있고 절도있어야 할 것이니, ”만일 내가 내 양의 무리를 심하게 몰아 지치게 하면 모두 하루에 죽어 버릴 것이다.”하신 성조 야곱의 분별력을 생각할 것이다. 

이밖에도 모든 덕행들의 어머니인 분별력의 다른 증언들을 거울삼아, 모든 것을 절도있게 하여 강한 사람을 갈구하는 바를 행하게 하고, 약한 사람은 물러나지 않게 할 것이다.”

 

그대로 분별력의 지혜를, 분별력의 사랑을 입증하는 구절들입니다. 획일적 잣대의 규칙이나 법이 아닌 사람 하나하나의 살아있는 현실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분별력의 사랑입니다. 옛 대선 후보의  “사람이 먼저다” 라는 모토도 생각납니다. 돈이, 법이 먼저가 아니라 사람이 먼저다라는 말입니다. 역시 사람 사랑이 분별의 잣대임을 입증하는 말마디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의 상황은 간단히 정리될 수 있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했을 때입니다. 먼저 시비를 걸고 나온 이들은 충실한 율법준수주의자들인 바리사이들입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에게는 율법 조항이 분별의 잣대입니다. 이들에게는 사람이 먼저가 아니라 법이 먼저입니다. 법이 절대적입니다. 사랑이 절대적이고 모든 법은 상대적인데 말입니다. 규칙대로, 법대로 하면 편할 수 있습니다. 책임질 일도 없습니다. 악의 평범성에 대해 말합니다. 악은 무사유에 기생합니다. 생각이 없을 때 법대로 하는 것이 때로 악이 될 수 있습니다. 

 

20세기 지성 한나 아렌트는 나치 전범인 아이히만이 재판에서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인식조차 못하고 있음을 보면서 ‘악의 원인을 사유하지 않음’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한마디로 바리사이들은 생각하지 않는, 생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살아있는 인간 현실에 대한 충분한 배려 없이 모두를 율법을 잣대로 재단하는 인정머리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요 율법 역시 사랑의 표현임을 잊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예를 들면서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 것을 증거로 들면서 결정적인 말씀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권위있는 말씀입니다. 시공을 초월한 영원한 진리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에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하느님이 바라시는 바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입니다. 자비가 바로 분별의 잣대임을 입증합니다. 성전보다 더 크신 분, 안식일의 주인이신 분. 하느님 자비의 화신이신 분, 바로 파스카의 예수님이 분별의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분별의 상황에 접했을 때 ‘예수님 같았으면 어떻게 하셨을까?’생각하면 저절로 올바른 분별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 답입니다. 파스카의 예수님이 분별의 잣대입니다. 예수님과 일치가 깊어질수록 예수님을 닮아 우리의 분별력도 날로 좋아질 것입니다. 사실 우리 삶의 목표와 의미는 영원한 도반이신 예수님과의 우정을 나날이 깊이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영원한 생명의 구원입니다. 우리 삶의 공동체 중심에, 또 우리가 거행하는 모든 전례의 중심에 언제나 현존하시는 파스카의 주님이십니다. 

 

마침 오늘 제1독서의 주제도 ‘파스카 축제’입니다. 바로 우리의 파스카 축제 미사도 궁극에는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오늘 탈출기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이날이야말로 너희의 기념일이니, 이날 주님을 위하여 축제를 지내라. 이를 영원한 규칙으로 삼아 대대로 축제일로 지내야 한다.”

 

구약의 파스카 축제가 파스카 양이신 예수님을 통해 완전히 새롭게 진화되었고, 우리는 날마다 파스카 축제인 미사를 봉헌하며 파스카 영성을 새롭게 합니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파스카 영성, 하나만 있을 뿐입니다. 파스카 축제, 파스카의 예수님, 파스카의 신비, 파스카 전례, 파스카의 기쁨, 파스카의 사랑, 온통 파스카가 들어가는 말마디들입니다. 

 

파스카의 예수님이야말로 분별의 잣대요 율법의 완성입니다. 파스카 영성은, 파스카의 사랑은 무엇입니까?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사랑, 어둠에서 빛으로의 사랑, 절망에서 희망에로의 사랑입니다. 참으로 죄, 죽음, 율법 등 온갖 예속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이, 일방적 아가페 사랑이 바로 파스카의 사랑입니다. 부단히 새롭게 시작하는 사랑이 바로 파스카의 사랑입니다. 

 

파스카의 주님은 이 거룩한 파스카 축제인 미사은총의 사랑으로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시고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시며 무엇보다 참 좋은 분별력을 선사하십니다. 저절로 화답송 시편을 노래하게 됩니다.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 부르리라.”(시편116,12-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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