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7.21.연중 제16주일(농민주일)
창세18,1-10ㄴ 콜로1,24-30 루카10,38-42
환대의 영성
-주님과 이웃을, 농민을 환대합시다-
환대의 영성이 참 절박한 시대입니다. 환대의 주님, 환대의 사랑, 환대의 기쁨, 환대의 행복등 모두를 포괄하는 환대의 영성입니다. 환대의 주님이십니다. 참으로 주님을 닮을수록 환대의 사람이 됩니다. 주님 환대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 환대입니다. 전통적으로 수도원은 하느님 환대의 집으로 불립니다. 베네딕도 규칙 ‘제53장 손님들을 맞아들임에 대하여’를 찾아 보면 서두 환대에 대한 아름다운 구절이 나옵니다.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맞아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장차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는 나를 맞아주었다’라고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로 주님의 환대를 반영하는 환대의 집이자 주님의 집인 수도원입니다. 마치 가슴 활짝 열고 찾아오는 이들을 환대하는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이 흡사 주님의 환대를 반영하는 듯 합니다. 오래 전에 써놓은 ‘환대의 산처럼’이란 자작 시가 생각납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아버지 산 앞에 서면
저절로 경건 겸허해져/모자를 벗는다
있음 자체만으로/넉넉하고 편안한/산의 품으로 살 수는 없을까
바라보고 지켜보는/사랑만으로/늘 행복할 수는 없을까/환대의 산처럼!-
아버지의 집인 수도원에서 아버지처럼 환대하는 모습을 상징하는 불암산입니다. 또 ‘환대는 꽃처럼’ 이라는 언젠가 나눴던 시를 다시 나눕니다.
-“환대는 꽃처럼 하는 것이다/한 번이라도 찌프린 적 있더냐
하루 이틀 몇 날이든/언제나/활짝 핀 환한 얼굴로/오가는 이들
맞이하고 떠나 보내는/주차장 옆 코스모스 꽃 무리들
피곤한 모습 전혀 없다/볼 때 마다 환해지는 마음이다
환대는 꽃처럼 하는 것이다.”-
요즘 가끔 꽃인사 유머를 통해 실천하는 사랑의 환대 정신입니다. 이보다 더 기분좋게 하는 청담淸談같은 인사말도 없을 것입니다.
“산나리꽃 아침인사 받으세요.”
“호박꽃 아침인사 받으세요.”
“백합꽃 아침인사 받으세요.”
“달맞이꽃 아침인사 받으세요.”
아마 따뜻하고 환한 꽃같은 얼굴의 인사보다 참 좋은 환대의 표현도 없을 것입니다. 웃을 때는 꽃처럼 보이는 얼굴들입니다. 하여 보속시 말씀처방전 메모지에 자주 “웃어요”라는 붉은 색 선명한 스탬프를 찍어 드리곤 합니다. 백합꽃 아침인사에 대한 어느 자매님의 화답입니다.
-“ㅎㅎ 신부님, 선물 감사합니다. 백합 향기가 이곳까지 전해 오는 듯 합니다.^^ 신부님 더운 날씨에 건강 조심하시고 좋은 하루 되십시오.”
오늘 복음이나 독서의 말씀도 환대의 관점에서 보면 그 의도하는 바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방문하자 환대에 분주한 베타니아 마르타와 마리아 두 자매들입니다. 그대로 주님 향한 사랑의 표현이 환대입니다. 둘 다 참 아름다운 사랑의 환대입니다. 그러나 우선순위에서 차이가 났습니다. 진정한 주님 환대는 내뜻대로가 아닌 주님 마음에 드는, 주님 편하게 하는, 주님 중심의 환대여야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라는 환대는 경청의 환대였지 식사의 환대가 아니었습니다.
사랑스런 마르타의 환대도 고마웠을 것입니다만 주님이 바라신 것은 마리아의 경청의 환대였습니다. 하여 파스카의 예수님을 환대하는 미사도 경청의 말씀전례후 성식聖食의 성찬전례가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마르타에겐 큰 깨우침이 됐을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은 마리아 못지 않게 내심으로는 마르타를 사랑하셨고 그 사랑의 환대에 고마워하셨을 것입니다. 마르타 대신 내 이름을 넣어도 좋은 깨우침이 될 것입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환대의 우선 순위는 마리아의 모범대로 주님 말씀의 경청임을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서로간의 대화도 주님과 친교의 기도도 경청이 기본입니다. 참으로 주님 말씀의 경청으로 주님을 환대할 때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 우정의 사랑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환대하는 이들은 주님의 교회를 환대합니다. 교회의 일꾼이 되어 말씀을 선포하는 바오로가 그 모범입니다.
“그 말씀은 과거의 모든 세대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입니다.---그 신비는 여러분 가운데에 계신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는 영광의 희망이십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굳건히 서 있게 하려고, 우리는 지혜를 다하여 모든 사람을 타이르고 모든 사람을 가르칩니다.”
참으로 환대의 사도, 바오로입니다. 말씀의 환대, 교회의 환대, 그리스도의 환대가 일치를 이루는 교회의 일꾼 바오로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환대해주시는 주님께 대한, 교회에 대한 최고의 응답은 말씀의 환대입니다. 영광의 희망이신, 신비중의 신비이신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환대하는 것입니다. 이래야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굳건히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 사랑의 환대를 은혜로히 체험한 이들은 말씀을 환대하고 그리스도를 환대하고, 교회를 환대하고, 찾아오는, 만나는 모든 이들을 산처럼, 꽃처럼 환대합니다. 바로 제1독서 창세기의 아브라함이 그 모범입니다. 얼마나 극진히 나그네를 환대합니까?
모르고 셋을 환대했지만 하나는 주님이고 둘은 천사였습니다. 우리가 환대하는 이들을 통해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참으로 찾아오는, 만나는 이들 모두를 잘 환대함이 주님을 환대하는 것이며, 아브라함처럼 분명 축복도 받습니다.
오늘은 농민주일입니다. 참으로 농민들을 환대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분명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15,1)라고 천명하셨습니다. 참 날로 중요성이 부각되는 농업입니다. 아무리 첨단문명이라도 땅에서 나는 생명의 먹거리를 생산하지 못합니다. 만고불변의 진리가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입니다.
하느님이 보이지 않는 미래라면 인간과 자연은 보이는 미래입니다. 인간이 자연이 병들고 황폐화된다면 미래가 없습니다. 농촌을 살리는 것이 자연을, 인간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류의 미래는 지속가능한 농업뿐입니다. 농촌이, 농업이 농민이 살아야 자연도 사람도 삽니다. 농촌은 우리의 뿌리입니다. 농촌이 죽으면 우리도 죽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농부이십니다.
참으로 농업을, 농촌을, 농민을 환대해야 합니다. 깊이 넓게 볼 때 ‘필요한 것 한 가지’는 농촌을 살리는 것 하나뿐입니다. 기후변화에 대한 대책도 이것 하나뿐입니다. 지구상에서 인류문명이 존속할 수 있을지 여부는 앞으로 10년이 결정적인 기간이 될 것이라 합니다. 동아시아 바깥 지역 사람들에게는 ‘한반도 비핵화’보다 ‘세계의 녹색화’가 훨씬 더 긴박하고 절실한 현안이라 합니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말씀을, 교회를 환대한다면 농촌의 농민들을 환대해야 할 것이요 우리 삶의 근본자세도 바꿔야 할 것입니다. 한국사람처럼 소비하면 지구가 3.5개쯤은 되어야 한다 합니다. 참으로 환대 영성을 살려 한다면 가장 필요한 것이 생활습관의 혁명적 변화라는 생태적 회개요 쓰레기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것입니다.
주님은 환대의 모범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환대하시고 우리 역시 주님을 환대합니다. 주님의 환대와 우리의 환대가 만나는 축복의 미사시간입니다. 정주定住 영성과 환대歡待 영성이 일치를 이루는 요셉 수도원을 비유한 자작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중 한 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歡待)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親交)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