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뿌리는 삶’에 항구한 사람들 -믿음이 답이다-2019.7.24.연중 제16주간 수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ul 24,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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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7.24.연중 제16주간 수요일                                                                        탈출16,1-5.9-15 마태13,1-9

 

 

 

‘씨뿌리는 삶’에 항구한 사람들

-믿음이 답이다-

 

 

 

마태오는 13장에서 하느님 나라에 관한 7개의 비유를 모아 놓았습니다. 모든 비유가 예수님 자신의 생애를 상기시킵니다. 비유를 통해 은연중 드러나는 예수님의 삶이요 믿음입니다. 새삼 하느님 나라는 먼 미래나 밖에서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살아야 하는 현실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그 하느님 나라 신비를 사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오늘 첫째 하느님 나라 비유는 '씨뿌리는 사람'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항구하고 진실하고 절실한 삶의 자세, 지극한 인내의 믿음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일체의 원망이나 절망, 회의가 없습니다. 저변에는 하느님 향한 깊은 믿음과 희망이 자리잡고 있음을 감지합니다. 저 역시 매일 씨뿌리는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강론을 통한 말씀의 씨앗들은 참으로 다양한 영혼의 밭들에 뿌려질 것이고 하느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문득 연상되는 것이 프랑스의 작가 지오노가 실화를 바탕으로 썼다는 ‘나무를 심은 사람’이란 소설입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엘제아르 부피에’는 실제로 1913년부터 1945년 까지 황폐한 산에 나무를 심어 울창한 숲으로 변화시킨 사람으로 흡사 복음의 씨뿌리는 사람 예수님을 연상케 합니다.

 

-“나는 그동안 한 번도 그가 실의에 빠지거나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의심을 품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가 겪은 시련을 잘 아실 것이다. 나는 그가 겪었을 좌절에 대해선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런 숲을 이루기까지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고 자신의 신념을 이루기 위해 수없이 절망과 싸웠을 것이다. 1년 동안 1만 그루가 넘는 단풍나무를 심었으나 모두 죽어버린 일도 있었다.” -

 

바로 소설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한결같은 믿음의 사람이 주인공인 나무를 심은 사람입니다. 그대로 복음의 씨뿌리는 사람 예수님을 보는 듯합니다. 결국은 믿음이 답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환경에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얼마전 써놨던 ‘믿음’이란 짧은 자작시도 생각납니다.

 

-“하늘 배경에/날씨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는

늘/거기 그 자리

한결같은/정주定住의 불암산이다

믿음은 그런 것/나도 그렇다”-

 

씨뿌리는 사람은 믿음의 전형적 모범입니다. 결코 절망이나 좌절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아십니다. 넘어지면 즉시 다시 일어나 씨뿌리는 삶에 항구합니다. 삶은 과정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의 시야는 하느님을 닮아 저 멀리 열려 있습니다. 참 깊고 넓은 시야입니다. 그러니 오늘 지금 여기가 전부가 아님을 압니다. 하나의 과정일 뿐입니다.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고, 환경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현재의 과정에 충실할 뿐입니다. 하느님은 목표가 아닌 과정을 보십니다. 아니 순간순간이 과정이자 목표일 수 있습니다.

 

100% 완벽한 삶은 없습니다. 씨뿌리다 보면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을 수도 있고,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져 싹은 곧 돋아 났다가 말라 버릴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져 숨을 막아 버릴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인생입니다. 참 예측할 수 없는 다양하게 전개되는 삶입니다. 그러나 이런 외적 환경에 좌우되지 않고 내 삶의 제자리에서 항구히 씨뿌리는 삶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내가 바로 적입니다. 나와의 싸움이 바로 믿음의 싸움입니다. 이런면에서 삶은 매순간 ‘신뢰(trust)’의 ‘시험(test)’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진감래입니다. 믿음의 승리입니다. 바로 어떤 씨앗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때가 될 때까지 끝까지 견뎌 인내하며 씨뿌리는 삶에 항구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 눈에 실패지 하느님 눈엔, 믿음의 눈엔 성공일 수 있습니다. 소소한 일상의 영적전투에는 패할 수 있어도 궁극의 영적전쟁에는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설상 기대한 결과가 없다해도 좌절은 금물입니다. 결과는 하느님께 달린 것이니 과정에 충실하며 결코 인간 품위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순수한 믿음입니다. 결코 걱정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는 바 결과의 양이 아닌 순수한 믿음에 당신 자녀다운 고결한 품위있는 삶입니다. 그러니 매사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이런 점에서 탈출기의 이스라엘 백성은 얼마나 믿음이 부족하고 허약한지 깨닫습니다. 

 

믿음은 기억입니다. 믿음은 감사입니다. 믿음은 기다림의 인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놀라운 기적들을 까맣게 잊고 배고프고 목마른 현실에 일희일비하며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감사의 기억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이집트 탈출후 모세와 함께 불렀던 감사와 찬미의 노래 기억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탈출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대로 예나 이제나 인간의 부정적 보편적 믿음 부족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참 대책없는 사람들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은 저녁에는 메추라기로 또 아침에는 만나로 이들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똑같이 자비하신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천사의 양식으로 우리 모두의 영육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일거에 해소시켜 주시며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살게 하십니다. 또 하루하루 씨뿌리는 삶에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씨뿌리는 삶에 항구함은 바로 우리 분도회 수도자들의 정주서원이 목표하는 바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 첫 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하늘 향한 나무처럼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덥든 춥든,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하느님 불러 주신 이 자리에서

하느님만 찾고 바라보며 정주(定住)의 나무가 되어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살다보니 작은 나무가 

이제는 울창한 아름드리 하느님의 나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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