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와 삶 -기도해야 산다-2019.7.28.연중 제17주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ul 28,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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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7.28.연중 제17주일                                                                      창세18,20-32 콜로2,12-14 루카11,1-13

 

 

 

기도와 삶

-기도해야 산다-

 

 

 

수도원 뜨락, 밤새 깨어 활짝 피어 은은한 향기를 발하는 달맞이꽃, 바로 하느님만을 찾는, 하느님만으로 행복한, 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는 ‘주맞이꽃’ 수도승을 닮았습니다. 어제 써놓은 달맞이꽃을 나눕니다.

 

-“아침마다/달맞이꽃/환대가 새롭고 반갑다

밤새/깨어/임 기다리던 꽃

 

늘 거기 그 자리/아무도 돌보고 가꾸지 않아도

약치고 거름 주지 않아도

 

어디서나/때되면 잘 자라 피어나는 꽃

하늘님/친히/가꾸시고 돌보시는 꽃

 

하늘 사랑만으로/행복하기에/만족하기에

그윽한 향기에/저리도/청초한 아름다움인가 보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왜 기도합니까? ‘살기위하여’입니다. 살기위하여 숨쉬고 밥먹듯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숨쉬고 밥먹지 않으면 죽듯이 기도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영성이 없다!” 바로 기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기도를 잘 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욕심은 권할바 못되지만 기도 잘하고 싶은 욕심은 권합니다. 말그대로 청정욕같은 기도 욕심입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며 할수록 기도를 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기도는 사랑입니다. 테크닉, 기술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하느님과 사랑의 소통이, 생명이, 대화가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않아 하느님과 불통이면 영혼은 죽습니다.

 

아주 직접적 구체적 예를 듭니다. 요즘 장마철이 되어 은총의 하늘 비가 자주 쏟아지니 온누리가 생명의 초록빛 가득합니다. 장마에 메마른 대지가 하늘비에 촉촉이 젖듯이 영혼에 기도도 그러합니다. 화초에 자주 물 줘야 하듯이 영혼에 자주 물주듯 해야 하는 기도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랑하는 사이라도 자주 만나지 않으면 멀어지듯이 하느님과의 관계도 똑같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영혼은 하느님과 점점 멀어지기 마련입니다.

 

어제 토요일 오후 수도생활 처음으로 동향 출신의 신자 자매님의 초대로 자매님 장부의 구순 잔치에 참여하여 생전 처음 호텔에서 자매님의 가족과 친지들과 함께 하여 식사도 하고 자그마한 공연도 감상했습니다. 결론하여 자매님의 기도의 열매였습니다. 

 

뿌리없이는 꽃도 없습니다. 자매님 기도의 뿌리에서 활짝 꽃폈다 무수한 열매들로 드러난 축복 가득한 가족들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기도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절절히 깨달았습니다. 어찌 저와 같은 그 시골에서 이런 가족이 났을까 경이롭기까지 했습니다. 

 

얼마전 60대 중반의 여동생이 환한 얼굴 사진과 함께 보내준 메시지에 화답한 내용도 소개하고 싶습니다.

-“제가, 걱정 근심이 많은 사람인데 얼굴은 기도발 받아서 20년은 젊게 나오네요. 한참이나 웃었어요. 식구와 함께 나중에 영정 사진으로 쓰려고 해요. 주님 만나 뵐 때 예쁜 모습으로 뵈어야지요.”

“걱정 하나 없는 귀부인 같으니 기도의 힘이 정말 대단하구나!”-

 

기도의 비법은 무엇입니까? 참으로 간단하면서도 적절한 답을 어제 발견했습니다. 가톨릭 교회 어느 수도원의 고승에 버금가는 아빠스의 권고에 공감했습니다.

 

“기도하는 유일한 방법은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잘 기도하는 길은 많이 기도하는 것이다. 만일 이대로 할 기도 시간이 없다면, 적어도 규칙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그러니 기도가 적어지면 적어질수록 상황은 점점 나빠진다.”

 

말그대로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가 전부입니다. 모두다 기도에 달려있습니다. 누구나에게 활짝 열려 있는 기도의 문입니다. 윗 아빠스의 권고가 기도에 대한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오늘은 네 측면에 걸쳐 기도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과연 우리 신자들은 기도할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기도할 수 있고 기도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우리는 세례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기도해야 합니다.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났고 우리의 모든 잘못은 용서받았으니 기도의 문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우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우리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습니까? 참 좋은 선물인 성령으로 충만한 삶이니 말그대로 만사형통입니다. 저는 그런 무수한 증거를 봅니다. 주님께 기도중 청할 것은 성령 하나뿐입니다. 성령에 줄줄이 따라오는 무수한 영적열매들입니다.

 

둘째,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기도는 항구하고 간절해야 합니다. 죽을 때까지 숨쉬듯이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바로 복음의 ‘친구의 청을 들어주는 사람 비유’에서처럼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처럼 겸손과 흠숭의 자세로 간절히 물러남 없이 종신불퇴의 자세로 기도해야 합니다. 의인 쉰명, 의인 마흔 다섯 명, 의인 마흔 명, 의인 서른 명, 의인 스무 명, 의인 열명 까지 내려갑니다. 아브라함의 기도가 참 간절하고 끈기있고 집요합니다.

 

오늘 복음도 기도와 삶의 자세에 대한 귀한 가르침을 줍니다. 이처럼 기도하고 이처럼 살면 됩니다. 기도와 믿음, 삶의 원리입니다. 이래야 영적 탄력도 영적 감수성도 한결같을 수 있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셋째, “무엇을 청하는 기도입니까?”

바로 복음에서 예수님 친히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말씀하시며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가르쳐 주십니다. 중요 부분을 다시 확인합니다. 다음과 같은 필수적인 것을 청하는 것입니다. 

 

1.“아버지”라 부름으로 시작되는 기도입니다. 

아버지로 번역되었지만 실제 예수님은 아빠라 불렀습니다. 얼마나 눈물 나는 고맙고 반가운 호칭인이요. 믿는 이들 모두가 아빠로 부르는 하느님이니 우리는 모두 아버지의 자녀들이요 우리는 모두 서로 형제자매들이 됩니다. 하늘 아빠를 한 분 아버지로 모신 인류 가족이 됩니다. 매일 이 거룩한 미사중 새롭게 확인하는 진리입니다. 혈연보다 더 진한 연대감과 유대감을 주는 하늘 아빠 중심의 가족인 우리들입니다.

 

2.“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소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더불어 저절로 바로잡게 되는 우리의 기도와 삶의 자세입니다. 그분의 거룩함은 우리에게 의존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아버지의 이름은 우리 말은 물론 삶을 통해 거룩히 드러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너무나 자연스런 우리의 응답이자 의무입니다. 우리의 전 삶을 통해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날 때 복음 선포는 저절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3.“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기도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나라를 실현해달라는 기도에는 역시 우리의 응답도 따르게 마련입니다. 언젠가가 아닌 바로 오늘 여기서 아버지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일방적 아버지의 나라가 아니라 우리가 아버지의 나라의 일꾼답게 하느님의 공동협력자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아버지의 나라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로지 아버지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함이 우선입니다. 우리 삶을 아버지 중심으로 하여 날로 비워갈 때 아버지를 닮아갑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모두입니다. 

 

4.“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기도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간절히 기도할 때 정말 무엇이 본질적인 필요한 양식인지 드러납니다. 삶은 더욱 단순해지고 소박해 집니다. 거품은 사라지고 본질만 남습니다. 꼭 필요한 날마다 양식을 청하며 하루하루 최선의 노력을 다하며 삽니다. 주님 주셔야 할 날마다의 일용할 양식의 선물이지만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한 우리의 최선을 다한 노력도 필수입니다.

 

5.“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기도하는 것입니다. 용서받기 전에 선행되어야 하는 이웃의 잘못에 대한 용서입니다. 이 또한 은총으로 가능합니다. 우선 용서되지 않더라도 용서의 지향은 던저 놓고 항구히 기도하다 보면 때가 되면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게 됩니다. 그러니 의식적인 용서의 노력을 하면서 항구히 바치는 기도가 중요합니다.

 

6.“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삶에 유혹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무수한 유혹을 통과하게 해달라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치 유혹의 바다에 빠지지 않고 유혹의 바다를 유유히 흘러가는 배처럼 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유혹에 빠졌을 경우, 신뢰 상실은 물론 이에 따른 손실은 얼마나 큰지요. 삶은 유혹입니다. 기도해야, 하느님의 은총 있어야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더불어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한 우리의 노력도 필수입니다.

 

이렇게 청하는 기도가 우리 기도의 기본입니다. 전반부 둘은 하느님 중심의 삶에 대한 청원이고 후반부 셋은 일상의 삶에서 필수적인 것들의 청원입니다.

 

넷째, “왜 기도해야 합니까?”

하느님은 다 알고 계시는데 무슨 기도가 필요합니까? 우리가 아쉬워서 필요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기도가 항구하고 깊어질수록 무엇이 필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본질적인 것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 가면서 삶은 단순해집니다. 

 

정말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아가면서 지혜롭고 겸손해지며 순수하고 자비로워집니다. 더불어 삶은 자유로워지고 하느님의 뜻대로 청하게 되고 또 살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회개도 겸손도 없고 참 나의 실현도 불가능합니다. 무엇보다 평생 공부해도 여전히 부족한 주님의 기도입니다.

 

참으로 기도가 깊어지면서 남는 것은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주님의 기도' 하나 뿐일 것이고, 무엇을 ‘해달라(to do)는, 무엇을 ‘갖게 해달라(to have)’는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이 되게 해달라(to be)’는 기도 하나 뿐일 것입니다. 아무 것도 원하지 않고 하느님 한 분 만을 원할 것입니다.

 

기도중의 기도가 미사입니다. 세상에 미사보다 더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기도는 없습니다. 주님의 기도 역시 미사 안에서 더욱 빛이 납니다. 주님의 기도를 그대로 이루어 주는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당신 중심의 찬미와 감사의 삶을 확고히 해 주시며 일용할 양식인 말씀과 성체와 더불어 필요한 모든 좋은 것을 선사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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