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움과 신앙 -거룩한 공동체 전례의 고마움-2019.8.2.연중 제17주간 금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Aug 0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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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8.2.연중 제17주간 금요일                                              레위23,1.4-11.15-16.27.34ㄴ-37 마태13,54-58

 

 

 

놀라움과 신앙

-거룩한 공동체 전례의 고마움-

 

 

 

놀라움은 신앙의 시작입니다. 놀라움에서 시작되는 신앙입니다.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의 놀라움의 기적들입니다. 놀라움의 감동이 마음을 정화합니다. 놀라움에서 저절로 샘솟는 찬미와 감사, 감동, 감사, 기쁨입니다. 우리가 매일 노래하는 전례기도의 시편들 모두가 놀라움의 산물입니다. 자주 인터넷에 올리는 제 자작시 역시 모두가 놀라움의 산물임을 깨닫습니다. 

 

“아, 참 놀랍다!”, “아, 참 새롭다!”, “아, 참 좋다!”, “아!, 참 아름답다!", 모두가 놀라운 감동의 표현들입니다. 참으로 깨어 있는 영혼들이요 진짜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놀라움의 감동이 있을 때 늘 새 하늘에 새 땅의 새날입니다. 이런 놀라움의 감동이 사라질 때 무기력하고 무의욕하고 무감각한 단조로운 회색빛 일상의 반복입니다. 이런 삶은 안주지 정주가 아닙니다. 월리엄 워드워즈의 무지개란 시도 자연의 놀라움에 대한 감동적 고백입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내 가슴 설레느니,

나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다 자란 오늘에도 매한가지.

쉰 예순에도 그렇지 못하다면/차라리 죽음이 나으리라.”-

 

놀라움의 감동이 있어 나이에 관계 없이 영원한 젊음입니다. 늘 싱싱한 영적 감수성에 영적 탄력입니다. 제 자작시 행복기도중 다음 대목도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에 대한 감사와 감동의 고백입니다.

 

-“주님/당신은 저의 모두이옵니다

저의 생명/저의 사랑/저의 기쁨/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늘 읽어도 새롭고 좋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놀라운 기적들을 깨달을 때 저절로 감사와 감동, 감탄의 삼감의 삶이요, 이를 깨닫지 못할 때 저절로 생명과 빛이 사라진 원망, 절망, 실망의 어둡고 무거운 삼망의 삶입니다. 오틸리엔 연합회 예레미야 총 아빠스의 말씀중 결론 부분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2020년이 될 때도 더불어 여러 놀라움들이 있을 것을 희망합니다. 우리 하느님은 ‘놀라움의 하느님(a God of surprises)’이기 때문입니다.” 

 

놀라움의 하느님이요 하느님의 놀라움입니다. 하느님을 만날 때 날마다 기적이요 놀라움의 선물에 저절로 솟아나는 찬미와 감사, 감동이요 감탄입니다. 저절로 우리의 전 존재는 정화되고 성화되고 치유됩니다. 

 

하여 매일,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미사와 시편성무일도의 공동전례기도가 고맙습니다. 우리의 놀라움의 영적 감수성을, 감각을 살려 주기 때문입니다.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바꿔주는 매일의 공동전례기도 은총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전례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한 가톨릭 교회는 축복받은 하느님의 공동체입니다. 하여 우리 가톨릭 교회의 영성은 전례영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면에서 볼 때 오늘 제1독서 레위기 23장을 통해 이스라엘의 축일들의 중요성이 확연히 이해됩니다. 말그대로 축일의 민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하느님 사랑의 표현인 축일들이 공동체의 중심이 되어 신앙 공동체를 형성해주고 영적성장과 성숙을 이뤄줍니다. 이런 축일들의 기쁨이 없으면 무슨 재미, 무슨 기쁨으로 이 삭막한 광야인생을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너희가 거룩한 모임을 소집해야 하는 주님의 축일들은 이러하다. 이것들이 나의 축일이다.”

 

이어 소개되는 안식일, 파스카와 무교절, 햇곡식을 바치는 축일, 주간절, 칠월 초하루, 속죄인, 초막절등 축일들로 꽉 찬 이스라엘 공동체입니다. 계속 반복되는 주목되는, “이 날에는 거룩한 모임을 열고,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된다.” 라는 말마디입니다. 

 

주님을 위해 또 자신들을 위해 축일은 철저히 비워 놓아야 한다는 명령이자 의무입니다. 참으로 이런 축일 전례에 온마음으로 참여할 때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도 신앙심도 삶에 대한 놀라움의 감각도 살아날 것입니다. 사람은 종교적 동물임과 동시에 전례적 동물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살기위하여, 영혼이 살기 위하여 거룩한 공동전례행위는 필수입니다. 이런 놀라움의 관점에서 오늘 복음을 조명해 봅니다.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에 놀란 고향 사람들은 말합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 어머니는 마리아하고 하지 않나?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은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하느님의 놀라움으로 연결되지 못함이 안타깝습니다. 그대로 신앙 부족을 반영합니다. 선입견, 편견의 무지에 눈이 멀어 하느님의 놀라움을 체험하지 못했기에 하느님 찬미와 감사가 아닌 질투와 배척으로 예수님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하여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합니다.

 

정말 나자렛 고향 사람들이 하느님의 놀라운 기적들을 체험한 신앙들이었다면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들을 그대로 하느님의 놀라운 가르침과 기적들로 받아들였을 것이며 결코 예수님을 배척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선입견, 편견, 질투심 모두가 그대로 우리 인간의 원죄와도 같은 보편적 경향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놀라운 기적들의 체험 은총만이 우리의 선입견과 편견, 질투의 병을 치유함을 깨닫습니다. 하여 놀라움의 회복, 신앙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 끊임없이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를 바치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전례 은총으로 우리 모두에게 신앙을 더해 주시고, 선입견, 편견, 질투심을 치유해 주시며, 놀라움의 영적감각도 회복시켜 주십니다. 놀라움의 회복에, 영적 성장과 성숙에 ‘끊임없는 사랑의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와 삶’보다 더 좋은 수행도 없습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마라.”(시편103,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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