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잘 살기 -삶의 렉시오 디비나, 혼인, 이혼, 독신-2019.8.16.연중 제19주간 금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Aug 16,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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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8.16.연중 제19주간 금요일                                                                         여호24,1-13 마태19,3-12

 

 

 

함께 잘 살기

-삶의 렉시오 디비나, 혼인, 이혼, 독신-

 

 

 

어제는 뜻 깊은 광복절이었습니다. 광복절에 성모 승천 대축일까지 겹치니 참 행복한 느낌까지 들었습니다. 어제는 꽃인사 대신 축일을 맞이하는 분과 여러 지인들에게 “겸손하신 성모님의 아침 축하인사 받으세요.” 인사 말마디와 더불어 수도원 성당의 성모상 사진을 전송하니 참 기분도 좋았습니다. 한 형제의 진솔한 답신도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성모님의 인사를 받다니 저같은 죄인도 축복을 받는 군요. 감사합니다.”

 

우리 성모님은 이렇게 겸손하신 분입니다. 수도원 성모상은 무명의 조각가가 수도원 창고 개축시 베어낸 수십년된 오동나무를 깎아 만든 것이기에 참 각별 한 느낌입니다. 또 어제는 서울 분도 수녀원의 호세아 수녀의 종신서원식도 있어 저를 포함해 다섯 수도형제가 종신서원 축제에 참석했습니다.

 

어제는 74주년 광복절이었습니다.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도 참 풍부했습니다. 포인트 9로 무려 A4용지 9쪽에 이르는 장문의 연설문이었습니다. 대안없는 비판보다는 다양한 비전 제시가 참신했습니다. 강조점은 국내외적으로 ‘함께 평화롭게 번영을 누리며 잘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참 힘든 것이 함께 잘 사는 것입니다. 피정자들에게 함께 사는 것이 쉬운가 힘든가 물으면 이구동성, 한결같이 힘들다 합니다. 저역시 답이 없다고, 늘 새로이 시작하는 노력뿐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정말 지옥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고립단절되어 완전히 혼자 사는 것이 지옥이라 말하곤 합니다. 

 

얼마전 ‘은둔형 외톨이’라는 주제로 다뤄진 기사도 이색적이었습니다. 함께 살지 못해 홀로 은둔적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함께의 삶으로 끌어내기 위한 내용들을 다루고 있었습니다. 역시 함께 사는 것이 쉽지 않음을 밝혀 줍니다. 수도원을 방문하는 분들과 가끔 나누는 대화입니다.

 

-“여기가 천국입니다.”-

-“환경이 좋아서 천국인가요? 관계가 좋아야 천국입니다. 주님과의 관계, 너와 나의 관계가 좋으면 천국이고 나쁘면 지옥입니다. 함께 살아도 고립단절되어 서로 무관한 삶을 자초하면 바로 거기가 지옥입니다. 우리 수도자들은 서로 좋아서, 마음이 맞아서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하느님 중심의 방향이 같아서 함께 삽니다. 수도공동체의 중심은 주님이시고 모두 한결같이 주님을 바라보기에 함께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산티아고 순례시도 함께 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이지 깨달았습니다. 사실 함께 장시간 기차여행을 한다거나 함께 식사할 때 불편한 관계라면 참 힘들것입니다. 일정기간의 순례여정이 이처럼 힘들다면 평생 함께 사는 부부관계는 얼마나 힘들겠나, 하여 이혼도 많을 수 뿐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졸혼(卒婚;결혼을 졸업함)이란 현상까지 도래한 세상입니다. 

 

오늘 복음도 혼인, 이혼, 독신에 대한 내용입니다. 함께 사는 일이 쉽지 않음을 말해 줍니다. 혼인에 대한 주님의 원칙적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나서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한 몸이 될 것이다.’하고 이르셨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

 

그러니 혼인하면 함께 살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혼인이 이상이라면 이혼은 현실입니다. 혼인 이상으로 이혼에 고뇌했을 것을 생각하면 이혼자라 하여 무조건 비판은 금물입니다. 주님의 위 말씀은 율법조항이 아니라 함께 살기를 바라는 주님의 간절한 원의가 담겨 있을 뿐, 참으로 불행하고 힘든 혼인관계라면 주님은 이혼도 묵인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함은 다음 재미있으며 의미심장한 예화가 말해 줍니다.

 

“십대 부부는 신나게 살고, 이십대 부부는 꿈속에 살고, 삼십대 부부는 사랑하며 살고, 사십대 부부는 싸우면서 살고, 오십대 부부는 미워하면서 살고, 육십대 부부는 불쌍해서 살고, 칠십대 부부는 고마워서 산다.”

 

참 많이 인용했던 예화입니다. 연정戀情으로 시작하여 우정友情의 사랑으로 성숙成熟되기까지 과정을 재미있게 요약한 것입니다. 비단 부부공동체에만 해당된 것이 아니라 모든 공동체내의 관계의 성장과 성숙을 암시하는 예화입니다. 끝까지 인내하고 견뎌, 성장 성숙되어가야 하는 삶의 과정이요, 끝까지 인내하며 견디는 자가 궁극의 인생 승리자임을 깨닫습니다.

 

사람마다 살아가는 형태는 참 다양합니다. 혼인하여 잘 살아가는 이들도 있고, 함께 살아도 남남으로 살아가는 이들도 있고, 이혼하여 혼자 살아가는 이들도 많고, 아예 혼인도 이혼도 아닌 독신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도 많습니다. 독신중에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자발적으로 하늘 나라를 위해 봉헌된 수도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피해야 할 것은 완전고립의 혼자의 자폐적 삶입니다. 어떤 형태든 함께의 삶안에 주님을 중심에 두고 서로 사랑하고 섬기고 존중하며 개방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이는 도반과 더불어 보이지 않는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을 삶의 중심에 두고 부단히 회개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속감은 인간의 본능적 욕구입니다. 힘들어도 어떤 형태든 공동체에 속해 함께 살아야 합니다. 잇점이 훨씬 많습니다. 대부분 문제는 남이나 공동체가 아닌 내가 문제입니다. 그러니 더불어 살아야 나를 알 수 있고 내적성장과 성숙도 가능합니다. 떨어져 혼자의 고립된 삶이라면 내적성장과 성숙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삶의 중심인 주님과의 우정과 더불어 보이는 보이는 형제들과의 우정입니다. 상식에 기초한 인간으로서의 형제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필수입니다. 깊고 넓게 보면 모든 형태의 삶이 교회가정공동체에 속해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이젠 나라가 큰 가정 역할을 하는 복지국가가 되고 있는 추세지만, 애초부터 교회는 인류가정공동체를 지향했습니다. 여기서 제가 제안하는 바는 성서 렉시오 디비나를 생활화 하자는 것입니다. 

 

특히 믿는 이들은 혼인자든, 이혼자든, 독신자등 생각없이, 영혼없이 살 것이 아니라, 성서 렉시오 디비나와 더불어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와 개인 삶의 역사에 대한 렉시오 디비나를 생활화하여 살자는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깊이하면서 자기를 비워가는 것입니다. 신구약 성서와 더불어 내 삶의 역사를 렉시오 디비나 묵상을 깊이하면 삶의 문장의 주어는 하느님이심을 깨달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스켐집회에서 여호수아의 연설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앞에서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렉시오 디비나입니다. 보십시오. 온통 문장의 주어는 하느님입니다. 모두 하느님께서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바로 우리 믿는 이들 삶의 문장의 주어는 하느님이십니다. 이런 렉시오 디비나의 생활화를 통해 하느님 중심의 삶이 깊어지면서 그분을 닮게 되고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참으로 힘들고 어려울 때 내 공동체 삶의 역사를, 내 개인적 삶의 역사를 주님을 중심에 두고 부단히 묵상하는 렉시오 디비나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렉시오 디비나의 생활화로 주님을 중심으로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의 관계를, 그리고 함께 하는 형제들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날로 새롭게 하시고 우리 모두 날마다 각자 삶의 성경책 한쪽을 잘 써나가게 하십니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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