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삶 -사랑과 신뢰의 관계-2019.8.29.목요일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Aug 2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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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8.29.목요일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예레1,17-19 마르6,17-29

 

 

 

영원한 삶

-사랑과 신뢰의 관계-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입니다. 새벽 성무일도시 아름답고 은혜로운 초대송 후렴과 찬미가, 그리고 즈가르야 후렴으로 하루를 시작한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요한은 주님에 앞서 수난을 당하였으니, 천주의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께 어서와 조배드리세.”-

 

-“드높은 공덕갖춘 행복한 이여/당신은 깨끗하기 눈과도 같고

죄라곤 모르옵는 능한 순교자/은거를 사랑하신 예언자시여.

 

당신의 높은 성덕 우리게 입혀/굳은 맘 박힌돌을 없애 주시어

거칠고 굽은 길을 평탄케 하며/우리를 지름길로 인도하소서.”-

 

-“신랑의 친구가 그의 음성이 들릴 때 기쁨에 넘치듯/내 마음도 기쁨으로 가득 차 있도다.”-

 

예수님 없는 세례자 요한, 세례자 요한 없는 예수님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두분이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을 중심으로 이심전심 얼마나 깊고 아름답고 돈독한 우정관계에 있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고립단절의 혼자가 지옥입니다. 제가 웬만해선 쓰기 싫어하는 말마디가 지옥입니다. 그러난 엄연한 현실 또한 지옥입니다. 죽어서 가는 하늘 나라가 아니듯 죽어서 가는 지옥이 아니라 이미 오늘 지금 곳곳에서 목격되는 지옥같은 현실입니다. 

 

관계를 떠나 살 수 없습니다. 존재는 관계입니다. 이어져 연결되면 살고 끊어져 단절되면 죽습니다. 하여 유대紐帶와 연대連帶를 말하는 것입니다. 고독도 그 자체가 아닌 내적 유대를 목표하고 있습니다. 외딴 섬같지만 아래 깊이에서는 하나의 지구에 연결되어 있듯이 말입니다.

 

제가 요즘 문자 메시지로 이런저런 소식을 전달할 때, 의도적으로 자주 담대하게 사용하는 “사랑하는---”이란 말마디입니다. 사랑이 필요한 분이라 생각될 때는 더욱 사용하는 “사랑하는---”이라는 말마디입니다. ‘혼자’가 아니라는 관계속의 존재임을, 또 자신의 책임감을 일깨우기 위함입니다. 

 

“사랑하는-”일단 우선 고백으로 던져 놓고 보면 사랑은 뒤따라 오는 법입니다. “사랑하는---”이라는 복된 덫에 스스로 매일 필요도 있습니다. 빈말이라도 하면 할수록 좋은 “사랑하는” 이란 말마디입니다. 어제 2년만에 피정왔다는 개신교 자매를 만나 대화를 나눴습니다.

 

“정신과에 갈까, 명상센터에 갈까 할까 하다 수도원에 왔는데 참 잘한 것 같습니다. 2년전 왔을 당시 남편은 건강했었는데 그 사이 남편은 폐암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렇게 갑자기 돌아갈 줄은 몰랐습니다. 돌아가던 날 아침, ‘나 오늘 갑니다. 목사님 불러 예배하고 싶습니다.’라는 부탁에 목사님에게 연락했더니 바쁘다 오후에 온다 했다가 급히 일정을 바꿔 오전에 왔고 남편은 예배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매는 남편의 이런 마지막 선종의 죽음에 큰 위로의 구원을 체험했고 목사님또한 장례 예배 설교중 이 일화를 인용하며 남편은 하늘 나라에 갔다고 언급했다 합니다. 이렇게 좋은 관계 중에 떠남으로 부인 안에 영원히 살게 된 남편입니다. 만일 남편이 아무런 관계 확인 없이 혼자의 외로운 죽음이었더라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었겠는지요.

 

다 사라져도 관계만은 영원합니다. 우리가 죽어 세상을 떠나도 관계는 영원히 남습니다. 주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무엇보다 주님과 사랑의 앎의 관계를 깊이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영원한 생명’이라 합니다. 세상을 떠난 성인들같지만 하느님 안에, 우리 안에 영원히 살아있는 성인들입니다. 

 

성인들뿐 아니라 좋은 추억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 주님께 간 수도형제들, 친지들 또한 주님 안에, 우리 안에 영원히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아주 예전에 민들레꽃을 보며 써놨던 “영원한 삶”이라는 시도 생각납니다.

 

-“꽃졌다하여 끝난 것이 아니다/떠날 채비는 끝났다

민들레 홀씨 형제들/언제 떠나 어디에 닿을 지는/아무도 모른다

임만이 알뿐이다/몇날 동안 참 행복했고 화려했다

이제/샛노랗게 빛났던 하늘 사랑 추억/씨앗마다 가득 담고

임 바람 불기만 기다릴 뿐이다/꽃졌어도 계속되는 생명

바로 이것이 영원한 생명이구나

죽어 사라져도/끊임없이 사랑의 홀씨들 나눴던 삶/죽음은 없다

영원한 삶이다/나눌수록 풍성해지는 생명이다/떠날 채비는 끝났다”-

(2001.5.4.)

 

민들레 노란꽃을 생각하니 얼마전 고백성사를 본 ‘노란신’이란 어느 자매의 재미있는 이름도 생각납니다. 민씨에 들레, '민들레' 성명을 본적도 있고 진씨에 달래, '진달래'라는 성명도 본적이 있습니다. 꽃졌다 하여 끝난 것이 아니듯 죽었다 하여 끝난 것이 아니라 꽃은 열매의 씨앗으로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의 관계입니다. 

 

수도원 경내의 꽃피고 지는 모습을 관찰해도 재미있습니다. 봄부터 피기 시작한 꽃들은 줄줄이 형형색색의 꽃들로 이어집니다. 한꽃이 끝나면 다른 꽃이---계속됩니다. 역시 우리가 세상을 떠나도 계속 공동체를 이어갈 형제들입니다. 바로 이렇게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생명의 관계, 사랑의 관계가 영원한 생명입니다. 주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관계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의 죽음 전후로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는 장면과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이 나옵니다. 헤로데의 불의를 꾸짖다 순교한 정의와 진리의 예언자,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과 깊은 내적 관계에 있음을 봅니다. 세례자 요한이 혼자의 외로운 죽음인 듯 하지만 하느님 안에서 예수님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고 당신의 죽음도 예감했을 것이며 또 요한의 몫까지 충실히 살 것을 다짐하며 전의를 새로이 했을 것입니다.

 

외관상으로은 혼자같지만 내적으로는 하느님과, 예수님과 깊은 관계 중에 있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악의 연대’는 밖에서 볼때는 더불어의 관계같지만 내적으로는 혼자입니다. 바로 복음의 악인들인 생각없는, 영혼없는 헤로데 임금, 그의 아내 헤로디아, 헤로디아의 딸 무녀 살로메가 그러합니다. 그대로 내적으로는 고립단절의 지옥을 사는 이들입니다. 이런 생각 없는, 무사유의 사람들에 기생하는 악임을 알아야 합니다.

 

실제 오늘을 사는 우리 안에서도 영원히 살아있는 세례자 요한이요, 영원한 죽음의 지옥의 사람들을 상징하는 헤로데, 헤로디아, 살로메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의 고립무원의 처지에 있는 예레미야와 복음의 세례자 요한의 처지가 흡사합니다. 이런 사면초가, 고립무원의 처지에서도 끝가지 견딜 수 있는 구원의 힘은 주님과의 관계였음을 봅니다. 예레미야와 주님과의 깊은 결속 관계를 알 수 있는 다음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오늘 내가 너를 요새 성읍으로, 쇠기둥과 청동 벽으로 만들어 온땅에 맞서게 하겠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위기상황일수록 주님과 깊은 신망애信望愛의 관계는 절대적입니다. 이래야 끝까지 무너지지 않고 자기를 견지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날로 당신과의 관계는 물론 형제들과의 관계도 깊이해 주십니다. 관계의 정화와 성화, 증진에 미사은총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화답송 다음 시편의 고백은 예레미야는 물론 예수님, 세례자 요한, 그리고 성인들과 모든 믿는 우리들의 고백처럼 들립니다.

 

“주 하느님, 당신은 저의 희망, 어릴 적부터 당신만을 믿었나이다. 저는 태중에서부터 당신께 의지해 왔나이다. 어미 배속에서부터 당신은 저의 보호자시옵니다. 주님, 저를 구원하소서.”(시편71,5-6ㄱ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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