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우리 삶의 모두이다 -사랑 예찬-2019.9.19.연중 제24주간 목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Sep 1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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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9.19.연중 제24주간 목요일                                                                           1티모4,12-16 루카7,36-50

 

 

 

사랑이 우리 삶의 모두이다

-사랑 예찬-

 

 

 

제 하루하루의 강론은 제 하루하루의 영적 양식입니다. 누가 저에게 “무슨 맛으로, 무슨 기쁨으로 사느냐?” 묻는다면 저는 지체없이 “하느님 사랑하는 맛으로”, “하느님 사랑하는 기쁨으로” 산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 강론 주제도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그대여’로 시작되는 제1독서에는 티모테오에 대한 바오로 사도의 사랑이 구구절절이 녹아 있습니다. 생명을 주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행복하게 사랑, 바로 사랑이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나는 인생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라고 주어진 인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책임입니다. 하느님 앞에 갔을 때도 유일한 질문은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았는가?’ 이 하나일 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유일한 소망도 단 하나 우리 모두가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가? 아무리 물어도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참으로 사랑하고 사랑받을 때 내가 누구인지 또렷해 지는 정체성에 높아지는 자존감입니다. 아무리 재능 많고 학식많고 재산 많아도 정체성, 자존감 약하면 인간관계도 힘들거니와 결코 행복한 성공적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열등감, 우월감 모두 허약한 정체성과 자존감을 반영합니다. 참으로 교육의 목적도 정체성 또렷한, 자존감 높은 참 사람을 키워내는 데 있습니다. 저절로 이에 대한 유일한 답은 사랑뿐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은 모두입니다. 사랑의 성사, 사랑의 용서, 사랑의 회개, 사랑의 찬미, 사랑의 구원, 사랑의 치유, 사랑의 신비, 사랑의 수행, 사랑의 관상, 사랑의 기적 등 사랑이 앞에 붙는 말마디는 끝이 없습니다. 제가 2000년7월 처음 충북 진천 순교복자수녀원 무아의 집 이곳에 피정지도차 온 후 만 19년이 지난 2019년 9월! 이번 온것도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기적입니다.

 

어제 팬티와 팬티끈에 대해 즉 육신과 영혼에 대해 실감나는 설명을 드렸는데 팬티끈이 상징하는 바 영혼의 끈이요 사랑의 끈입니다. 참으로 영혼의 힘, 사랑의 힘이 좋으면 육신은 저절로 영혼을, 사랑을 따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입니다. 참으로 사랑의 수행을 통해서만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는 존엄하고 고귀한 품위의 참 사람의 참 내가 됨을 깨닫습니다. 성서는 참으로 온통 사람을 사랑하는 하느님의 이야기들이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사실 눈만 열리면 하느님 선물로 가득한 세상임을 깨닫습니다. 

 

자연 피조물의 아름다움도, 삶의 아름다움도, 예술의 아름다움도, 전례의 아름다움도, 모두 하느님 사랑의 표현들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처럼 아름다움으로 표현됩니다. 우리가 바치는 아름다운 시편들안에 구구절절 녹아있는 하느님의 사랑이요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입니다. 어제 시편 성무일도중 다음 대목이 특히 마음을 울렸습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라/당신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네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고/네 모든 아픔을 낫게 하시니

죽음에서 네 생명 구하여 내시고/은총과 자비로 관을 씌워 주시는 분

한평생을 복으로 채워주시니/네 청춘 독수리 마냥 새로워지도다.”(시편103,2-5)-

 

얼마나 아름답고 은혜로운 시편인지요. 이런 하느님 사랑에 대한 자연발생적 응답이 우리의 사랑의 찬양과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해 깨달은 자는 결코 자기 죄에 좌절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회개로 즉시 용서하시는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죄녀가 그 빛나는 모범입니다. 죄녀의 주님께 대한 사랑은 다음 묘사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면서,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기 시작하였다.’-

 

회개의 눈물, 사랑의 눈물, 감사의 눈물 등 눈물의 영성이 가득 담긴 죄녀의 눈물입니다. 참으로 지순한 죄녀의 영혼입니다. 죄에 대한 유일한 대책은 사랑뿐입니다. 죄녀의 사랑에 감동하신 주님의 감동적인 용서와 구원의 선언입니다. 복음의 바리사이 시몬은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이 여자를 보아라.---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 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이어지는 죄녀에 대한 말씀도 감격적입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말마디를 ‘네 사랑이 너를 구원하였다’로 바꿔도 무방합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같습니다. 그러니 죄책감에 아파할 것이 아니라 회개와 더불어 더욱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회개한 사랑의 영혼들의 과거는 불문에 붙이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참으로 죄가 없어 마음의 순수가 아니라 사랑할수록 마음의 순수요 관상임을 깨닫습니다. 죄를 지으라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을수록 즉각적인 회개와 더불어 하느님을 더욱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죄의 깊이와 사랑의 깊이는 함께 갑니다. 참으로 사랑으로 회개할 때 죄의 깊이는 사랑의 깊이로 변합니다. 회개한 다윗이, 회개한 바오로가, 회개한 아우구스티노가, 회개한 프란치스코가 그 빛나는 모범입니다.

 

하느님의 관심사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이 아니라 ‘회개하는 죄인’입니다. 끊임없는 사랑의 회개와 더불어 향기 그윽한 발효인생이 되지만, 사랑의 회개에 소홀하면 십중팔구 악취를 풍기는 부패인생이 되기 쉽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 모두를 당신 사랑으로 가득 채워 주십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끊임없이 고백하라 있는 사랑이요, 실천하라 있는 사랑입니다. 끝으로 주님 사랑을 고백한 ‘행복기도’ 일명 ‘예닮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 은총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삶중에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말씀으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생명, 저의 사랑,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이제 당신을 닮아

온유와 겸손, 인내의 사람이 되는 것이

제 소망이오니 간절히 청하는 제 기도를 들어주소서

당신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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