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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연중 제26주간 수요일                                                          느헤2,1-8 루카9,57-62

 

 

 

이탈의 여정

-사랑의 이탈, 이탈의 자유-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집착에서의 이탈의 여정입니다. 끊임없이 자발적 사랑으로 비우고 버리고 내려놓고 오매불망 그리는 우리의 영원한 목적지 예루살렘을 향한 이탈의 순례여정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바, 예루살렘은 우리의 영적 여정의 궁극 목적지 하느님의 집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을 비롯한 우리의 모든 성인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듯 예루살렘을 사랑하고 그리워했습니다. 매일 미사를 통해 실현되는 새 예루살렘을 찾아 성전 미사에 참석하는 우리들입니다. 오늘부터 새롭게 시작되는 제1독서 느헤미야기입니다.

 

오늘 느헤미야기 상황은 기원전 445년전 일이니 무려 거의 2500년 일입니다. 느헤미야 예언자는 당시 유배자로 페르시아에 궁궐에서 임금의 신뢰를 받는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흡사 창세기 이집트의 요셉을 연상 시키는 참 호감이 가는 훌륭한 신앙에 인품의 사람이었음을 봅니다.

 

“주님께서 위로하신다”는 느헤미야의 이름 뜻도 참 좋습니다. 이런 좋은 이름만 들어도 위로가 됩니다. 얼마전 어느 자매의 두 아들의 이름이 참 좋아 감탄한 적이 있습니다. 부부가 같이 의논하여 지은 이름, ‘고요한’, ‘고귀한’ 이름의 아들들인데 이름 뜻대로 잘 되었다는 이야기도 생각납니다.

 

오늘 느헤미야기에 앞선 이야기는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부터의 슬픈 소식을 듣고 여러 날을 주저앉아 울었다는 일화에 이어 느헤미야의 긴 감동적인 기도가 나오고 오늘 독서는 페르시아 임금의 허락을 얻어 예루살렘으로 잠시 귀향하는 일화가 펼쳐집니다.

 

유배지에서도 예루살렘은 예언자는 물론 유배자들인 이스라엘인들의 영원한 꿈이자 비전이요 희망이었음을 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듯 예루살렘을 사랑했던 느헤미야 예언자는 역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절박하고 진정성 가득한 느헤미아의 기도인지요. 이런 하느님 향한 열렬한 사랑의 기도가 이탈의 삶을 가능하게 함을 깨닫습니다.

 

“아, 하늘의 하느님, 위대하고 경외로우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과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계약을 지키시고 자애를 베푸시는 분! 귀를 기울이시고 눈을 뜨시어 당신의 이 종이 올리는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바로 간절한 기도후 전개되는 오늘의 제1독서입니다. 마침내 페르시아 임금은 느헤미야의 진정성에 감동하여 그에게 예루살렘 도성을 다시 세울수 있도록 잠정적으로 허락을 내리니 기도의 응답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모든 이의 사랑과 신뢰를 받음을 봅니다. 느헤미야의 고백입니다.

 

“내 하느님의 너그러우신 손길이 나를 보살펴 주셨으므로, 임금님께서는 내 청을 들어주셨다.”

 

유배지 페르시아에서도 하느님의 도성, 예루살렘을 오매불망 그리며 사랑하던 느헤미야의 심정이 바로 화답송 시편에서도 아름답게 표현됩니다. 

 

“우리 어찌 남의 나라 낯선 땅에서 주님의 노래를 부를 수 있으랴? 예루살렘아,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굳어 버리리라. 내가 예루살렘 너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너를 가장 큰 기쁨으로 삼지 않는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달라 붙으리라.”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우리 믿는 이들에게 예루살렘은 이런 곳입니다. 저에게는 매일 미사가 봉헌되는 여기 요셉수도원 성전이 영적 예루살렘입니다. 사실 많은 이들이 예루살렘을 찾듯이 끊임없이 수도원 하늘길을 걸어 영적 예루살렘 성전에 옵니다. 

 

바로 이런 예루살렘을 향해 십자가의 길, 순례길에 오른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승천과 부활의 파스카의 장소가 될 최종의 목적지인 예루살렘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이 예루살렘을 향한 도상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세 사람이 제자가 되길 청하나 예수님의 반응은 다 다릅니다. 

 

1.“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과연 이런 예수님을 따를 수 있겠는가, 장소로부터의 애착이나 집착에서 이탈하여 참으로 자유롭게 예수님을 따를 수 있겠는가 묻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도성 예루살렘을, 하느님을, 예수님을 사랑할 때 저절로 장소로부터의 자발적 이탈입니다. 

 

2.두번째는 예수님의 명령이 선행하며 대화가 전개됩니다.

“나를 따라라.”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느님, 하느님의 나라, 예루살렘이 예수님께는 동의어입니다. 참으로 냉혹한 주님의 말씀처럼 들립니다만 하느님의 나라 선포의 사명이 이렇도록 절박하다는 것입니다. 역시 가족애에 대한 집착에서 이탈할 것을 명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영원한 하느님의 도성 천상 예루살렘을 사랑하여 삶의 궁극의 희망으로 삼을 때 저절로 가족으로부터의 자발적 이탈일 것입니다. 철저한 이탈의 자세만 갖춰졌다면 아마 예수님은 잠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도록 허락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예전 법정 스님의 일화도 생각납니다.

 

“예전 서슬이 퍼렇던 수행자 시절, 사랑하는 할머님의 부음을 듣고도 장례에 참석치 못한 것이 지금은 후회가 됩니다. 그까짓 수행이 뭐라고---, 지금 같았으면 만사 제쳐 놓고 갈 것입니다.”

 

저 또한 수도원 초창기 어머님 팔순 잔치에 참석하지 못했던 것, 사랑하는 어머님이 또 형님들이 벼르고 별러 몇차례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밥한끼 사들이지 못하고 그냥 보내 드린 것이 내내 회한悔恨의 마음으로 남아 있습니다. 지금은 다 고인들이 되셨는데 지금 같다면 밥도 사들이고 대화도 나눴을 것입니다. 이건 분별의 지혜에 이탈의 사랑에 속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분별의 지혜요, 집착없는 이탈의 깨끗한 사랑, 아가페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또 하나 생각나는 일화가 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한약방을 했던 베드로 형제의 친형님이 예전 저명한 학승으로 조계종 총무원장이었는데 베드로 형제가 형 큰 스님을 방문했을 때, 도움을 받으러 간 것이 아니라 형님이 보고 싶어 방문했는데 그런 동생 없다며 한 번도 만나지 못했고 그렇게 형제는 둘 다 고인이 되었다는 일화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에게서 얼핏 이런 인상을 받습니다만 역시 사랑의 분별의 지혜가 절실한 상황입니다.

 

3.“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게 해 주십시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가족은 물론 과거로부터의 철저한 이탈을 명하시는 주님이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선포가 참으로 엄중한 사명임을 각성시키기 위함입니다. 이 또한 주님 사랑의 자발적 열매인 이탈임을 깨닫습니다. 과거는 지났고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삶에 갈림없는 단순한 마음으로 투신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 환호송에서도 바오로 사도의 이탈의 자유의 비밀이 환히 드러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머물려고,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겼노라.” 참으로 그리스도가 우리의 전부가 될수록 저절로 모든 지상 사물로부터의 집착에서 이탈하여 초연한 자유를 누릴 것이며 복음 선포와 섬김의 삶에 전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가에 등따뜻하고 배부르면 도닦기 힘들다는 말도 있고, 또 인정이 많으면 도심이 성글다는 말도 있습니다. 참으로 분별의 지혜가 중요한 대목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자발적 이탈의 수행에 초연한 자유요, 겸손한 사랑의 실천에 분별의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에게 이탈의 사랑과 자유를, 또 분별의 지혜를 선사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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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안젤로 2019.10.02 08:30
    사랑하는 주님, 주님을 사랑할 때 자발적 이탈의 수행에 초연한 자유요, 겸손한 사랑의 실천에 분별의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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