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여정 -사랑, 앎, 자유-2019.11.4.월요일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1538-1584) 기념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Nov 04,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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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4.월요일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1538-1584) 기념일 

로마11,29-36 루카14,12-14

 

 

 

깨달음의 여정

-사랑, 앎, 자유-

 

 

 

삶은 깨달음의 여정입니다. 하느님과 삶의 신비를 사랑으로 깨달아 알아가면서 참으로 자유로워집니다. 그러니 깨달음의 여정과 사랑, 앎, 자유는 함께 갑니다. 깨달음의 여정은 결국 무지로부터의 해방의 여정, 자유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삶은 깨달음의 여정입니다. 아무리 깨달아간다하여도 여전히 무지로 남아있는 신비의 영역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하느님은 이런 분입니다. 하느님 탐구는 끝이 없고 여전히 신비로 남아 있는 하느님이요, 인간은 절로 이런 하느님 앞에서 겸손할 수 뿐이 없습니다. 

 

장차 있을 온 이스라엘의 구원을 내다 보는 바오로의 하느님 찬미가가 참 아름답고 웅장합니다. 우리의 영적 시야를 한없이 확장시키는 느낌입니다. 찬미가 전부를 그대로 인용합니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 누가 주님의 생각을 안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누가 그분의 조언자가 된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누가 그분께 무엇을 드린적이 있어 그분의 보답을 받을 일이 있겠습니까?

과연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분께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로마11,33-36)-

 

이런 하느님 찬미가를 끊임없이 부르며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릴 때 알게 모르게 확장되는 우리의 영적 시야입니다. 이런 하느님 신비에 대한 깨달음은 순전히 은총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와 하느님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가는 우리 영적 삶의 여정입니다.

 

깨달음의 은총과 더불어 넓어지는 영적 시야에 깊어지는 영성입니다. 바로 위의 하느님 찬미가는 시편 139장에 근거합니다. 매 4주간 수요일 저녁성무일도 때 마다 부르는 감동적인 139장 찬미가 일부를 인용합니다.

 

“주여, 당신은 나를 샅샅이, 보고 계시나이다

앉거나 서거나 매양 나를 아옵시고, 멀리서도 내 생각을 꿰뚫으시나이다

걸을 제도 누울 제도 환히 아시고, 내 모든 행위를 익히 보시나이다

 

앞뒤로 이 몸을 감싸 주시며, 내 위에 당신 손을 얹어 주시나이다

알으심이 너무나 놀랍고도 아득하와, 내힘이 미치지 못하나이다

 

당신의 얼을 떠나 어디로 가오리까, 당신 얼굴 피해갈 곳 어디오리까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 주는 계시옵고, 지옥으로 내려가도 거기 또한 계시나이다

 

새벽의 날개를 이 몸이 친다하여도, 저 바다의 먼 끝에 산다 하여도

거기에도 당신 손은 나를 인도하시고, 그 오른손 이몸을 잡아 주시리라.”

 

얼마나 은혜로운 내용인지요. 한없이 신비로우며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이십니다. 이런 하느님의 신비와 자비를 깨달아 알아가는 공부보다 더 중요한 평생공부도 없을 것입니다. 영적 인간인 우리의 참 행복과 참 기쁨도 여기 있습니다. 

 

이런 하느님의 신비와 자비를 깨달아 알아갈수록 하느님을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예수님이십니다. 이런 깨달음에 바탕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권고입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대부분 이런 이해관계의 인간관계임을 깨닫습니다. 유유상종의 이해관계를 과감히 탈피하여 보답할 길 없는 이들과 함께 나누라는 것입니다. 그대로 하느님의 신비와 자비를 깨달은 자들입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아니 그 때의 보답이 아닌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보답입니다. 이런 행위 자체가 바로 하느님 자비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보답할 길 없는 불우한 이들에 대한 아낌없이 나누는 무사한 사랑의 행위가 그 사람의 됨됨이를, 영성을 반영합니다. 

 

유유상종의 끼리끼리 주고받는 이해관계의 인간관계는 정말 하느님 보기에 역겹고 혐오스런 것이며 참으로 회개해야 할 내용입니다. 참으로 부족하고 없는 이들을 무시하며 담을 쌓고 끼리끼리 이익을 나누며 자족하는 계급사회가 얼마나 죄스런 현상인지 깨닫게 됩니다. 교회만은 이들에게 활짝 열려 있어야 할 것이며 바로 이것이 교회의 존재이유일 것입니다.

 

정말 하느님의 신비와 자비를 깨달아 알아갈수록 부족하고 없는 이들과 함께 사랑을 나눔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여 끊임없이 하느님 찬미와 영광의 찬미가를 부르며 우리의 하느님 신비감각을, 자비심을 키워가고 자비를 실천하는 신비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당신을 닮아 신비롭고 자비로운 신비가들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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