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탄력 좋은 삶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와 믿음-2019.11.16. 토요일 성녀 제르투르다 동정(1256-1302) 기념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Nov 16,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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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6. 토요일 성녀 제르투르다 동정(1256-1302) 기념일

지혜18,14-16;19,6-9 루카18,1-8

 

 

 

영적 탄력 좋은 삶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와 믿음-

 

 

 

오늘 아침성무일도 아침기도중 시편92장 첫 두구절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좋으니이다 지존하신 님이여, 

주님을 기려 높임이, 그 이름 노래함이 좋으니이다. 

아침에는 당신의 사랑, 밤이면 당신의 진실을 알림이 좋으니이다.”

오늘 복음의 과부는 올바른 퍈결을 간청했지만 우리 믿는 이들은 주님 사랑만을 간청합니다.

 

분도회 수도자들은 오늘 성녀 제르투르다 동정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성녀 제르투르다는 서울 분도 수녀원의 주보성인이기도 합니다. 성녀는 만46세까지 참으로 치열한 삶을 살았던 분이였습니다. ‘얼마나 많이’가 아닌 ‘어떻게 잘’ 살 것인가가 영적 삶의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성인들은 우리에게 영원한 희망과 기쁨의 표지가 됩니다. 참으로 가톨릭 교회가 뼈대있는, 뿌리 깊은, 살아있는 전통을 지닌 훌륭한 가문임을 보여주는 참 좋은 증인들이 성인들입니다. 사실 좋은 환경에서 나온 성인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마치 시궁창에서 피어난 연꽃들처럼 거의 모두가 시련과 고난의 열악한 환경에서 나온 참 자랑스런 성인들입니다. 

 

제르투르다 성녀의 신심의 특징은 예수성심에 대한 강렬한 사랑의 체험과 헌신이었고 영성사에서 “예수성심의 신학자’라 불리어 졌으며, 예수성심공경을 시작한 선구자 혹은 첫 사도로 여겨졌습니다. 참으로 분도회 삶의 기본과 일상에 충실했던 건강하고 건전한 신비가로 분도회 영성의 모범과도 같은 성녀였습니다.

 

하여 13세기 독일의 위대한 신비가로 인정받아 ‘독일의 데레사’로 불릴 정도였습니다. 성녀는 탁월한 영성의 깊이로 ‘위대한’ 이란 칭호가 부여되었으며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올려지지 않았지만 성인으로 인정받고 존경받는 위대한 신비가 제르투르다였습니다. 1302년 11월16일, 만46세 선종시 임종어도 신선한 충격입니다.

 

“아, 신랑이 오신다!”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한 삶이었는지, 복음의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자신의 영적정배인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게 환호하며 맞이한 성녀입니다. 참으로 성인들의 공통적 특징은 예수님께 대한 항구하고 열렬한 사랑입니다. 성녀 사후 주님은 한 신비가에게 나타나시어, “제르투르다는 자유로운 나의 영혼이다” 말씀하셨다는 일화도 전해 집니다.

 

참으로 성녀에게 단 하나의 간절한 소원은 주님과 사랑의 일치였음을 봅니다. 우리의 기도생활 역시 단 하나의 소원은 예수님께 대한 사랑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과부의 간청을 들어 주는 재판관의 비유입니다. 가난한 과부가 우리라면 하느님은 불의한 재판관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에게 참으로 집요하게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청하는 과부처럼 기도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에 특별한 비법은 없습니다. 참으로 결코 포기함이 없이 간절하고 항구히 기도하는 것 하나 뿐입니다. 바오로 서간에서 무수히 반복되는 기도의 원리도 간절함과 항구함 둘입니다. 

 

과부의 간청의 명분과 원의는 뚜렷했고 정확했습니다. 다른 무슨 부당한 청이 아니라, ‘올바른 판결’로 이 말마디만 무려 4차례 나옵니다.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재판관이었지만 과부의 간절하고 항구한 청에 마침내 항복하여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 거리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참으로 올바른 원의라면 하느님 보시기에 가장 적절한 때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이 하느님 보시기에 올바른 청, 올바른 소원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청하겠습니다. 명분히 뚜렷하고 올바라야 복음의 과부처럼 간절하고 항구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영적 탄력 좋은 과부의 기도입니다. 탄력좋은 용수철처럼 좌절로 결코 무너지지 않고 즉시 튀어나와 간청하는 과부처럼 기도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수도원의 개들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도 지칠줄 모르고  따르는 탄력 좋은 모습 때문일 것입니다. 육신의 탄력은 떨어져도 영혼의 탄력이 떨어져선 안되겠습니다. 성인성녀들의 특징도 영적 탄력 좋은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임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간절한 청은 무엇입니까? 하느님 뜻대로 잘 살다가 잘 죽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아는 평생공부에 항구하여 무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삶의 여정중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뜻대로 예수님을 닮게 해달라는 기도가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과 비전을 변화시킵니다. 날로 예수님을 닮아가면서 저절로 따르는 내적변화입니다. 이런 사랑의 갈망을 담아 매일 평생 간절히 항구히 하느님께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입니다. 참으로 우리 수도자들에게 맞는 순수하고 올바른 기도입니다. 

 

그러니 복음의 과부처럼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참으로 영적 탄력 좋은 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이래야 ‘일상의 늪’에 빠지지 않습니다. 기도는 감상이나 기분이나 마음이 아니라 한결같이 깊고 올바른 지향에 따른 의지적 행위이자 평생 나와의 싸움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뜻이 이뤄지길 소원하며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바칠 때 내뜻은 하느님의 뜻과 일치되어 모든 것은 잘 될 것입니다. 

 

바꿔야 할 것은 외적 환경이나 사람이 아니라 이기적 ‘나’입니다. 끊임없이 기도로 주님을 닮아갈 때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내적변화에 이탈의 삶이요 무엇보다 보는 눈이 바뀌어 집니다. 모두가 좋고, 새롭고, 놀랍게 보일 것입니다. 저절로 문제들은 해결이 아니라 해소될 것입니다. 오늘 지혜서는 이런 내적변화의 기적같은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물이 있던 곳에서는 마른 땅에 나타나고 홍해는 장애물이 없는 길로, 거친 파도는 풀 많은 벌판으로 바뀌었습니다. 당신 손길의 보호를 받는 이들은 그 놀라운 기적을 보고, 온 민족이 그곳을 건너갔습니다.---그들은 어린양들처럼 이리저리 뛰면서 주님, 자기들을 구해 내신 당신을 찬양했습니다.”

 

그대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마치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처럼 보입니다. 바로 간절하고 항구한 찬양과 감사의 기도의 사람들에게 선사되는 내외적 기적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화답송 시편 후렴, “주님이 이루신 기적을 기억하여라” 말마디도 우리의 무딘 마음을 일깨웁니다. 

 

그러니 문제는 우리의 기도입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탄력좋은 기도에 탄력좋은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화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오늘의 현실에 그대로 드러맞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기도도 믿음도 증발되고 실종되어 생각없이, 영혼없이, 영성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세상 같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의 뜻대로 간절히, 항구히, 충실히 살게 하십니다. 끝으로 우리의 모든 소원이 담긴 행복기도 한 연으로 강론을 끝맺습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찬미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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