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중에도 품위있고 아름다운 성인답게 삽시다 -믿음, 희망, 사랑-2019.11.17. 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by 프란치스코 posted Nov 17,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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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7. 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말라3,19-20ㄴ 2테살3,7-12 루카21,5-19

 

 

 

가난중에도 품위있고 아름다운 성인답게 삽시다

-믿음, 희망, 사랑-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연중 제33주일이자, ‘제3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하느님이, 또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가장 사랑하는 이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도, 행복선언중 첫조항도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잘 드러납니다.

 

“공평하게 백성들을 다스리시러 주께서 오시리라.”(시편98,9).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루카6,20).

 

교황님의 담화문을 A4용지 10포인트로 출력해보니 무려 6쪽의 장문이었습니다. 교황님을 통한 하느님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얼마나 절절한지 정독하면서 깊이 깨달았습니다. 담화문중 시편 구절을 주제로 한 첫 말마디와 이에 대한 설명이 새삼스럽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가련한 이들의 희망은 영원토록 헛되지 않으리라”(시편9,19). 

이 시편 말씀은 지금도 놀라울 정도로 시의적절합니다. 신앙이 특히 가난한 이들의 마음에 아로새겨져 불의와 고통과 불안한 삶 앞에서 잃어버린 희망을 되찾아 줄 수 있다는 심오한 진리를, 이 말씀은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참으로 사랑하는 이가 성인입니다. 참으로 가난중에도 인간 존엄과 품위를 지키며 아름답게 사는 이가 성인입니다. 저는 이런 이들을 주변에서 자주 만날 때 마다 참 반갑고 기뻐하며 고마워합니다. 

 

연중시기 마지막에 접어 드는 연중 제33주일 말씀 주제도 온통 세상 종말에 관한 어둡고 무섭고 두려운 내용들입니다. 그러나 세상 종말을 전혀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가난중에도 깨어 품위있고 아름답게, 성인답게 사는 이들을 하느님께서 친히 보호하시고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얼마전 가난하나 착하게 살아가는 제자에게 성탄 츄리를 선물 받았고, 어제 역시 가난하나 행복하게 살아가는 형제에게 성탄 선물로 예수님께서 활짝 웃는 초상화 그림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하여 예수님 성탄의 희망과 기쁨을 앞당겨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희망을 잃으면 괴물이 된다!”

“중심을 잃으면 괴물이 된다!”

 

희망을 잃고, 중심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중심을 잡고 희망을 살아야 할 곳은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궁극의 희망이자 중심은 두 말할 것 없이 하느님이십니다. 어떻게 가난중에도, 시련과 고통중에도, 인간 존엄과 품위를 지키며 아름답게, 성인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겠는지요. 

 

첫째, ‘믿음의 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무신불립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습니다. 하느님 중심에 믿음의 뿌리 깊이 내린 사람들은 결코 불안이나 두려움이 없습니다. 믿음의 뿌리가 깊지 못하고 약하기에 불안과 두려움에 포류하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빛이 두려움과 불안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거창한 믿음이 아닙니다. 각자 주어진 삶의 제자리에서 본분에 충실하면서 묵묵히, 항구히, 한결같이 살아가는 여여如如한 정주의 삶이 참으로 건강하고 건전한 믿음입니다. 바로 제2독서 바오로 사도와 그 일행이 좋은 모범입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무질서하게 살지 않았고, 아무에게서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 낮으로 일하였습니다.---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시하고 권고합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

 

믿음의 진정성은 주어진 섬김의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질서있는 삶을 통해 입증됩니다. 참으로 무서운 것이 무질서한 삶입니다. 무질서하게 살 때 ‘무기력의 늪’에 빠지고 몸과 마음도 서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도 우리 모두 경거망동, 부화뇌동하지 말고 제 삶의 자리에 충실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제 삶의 자리에서 꿋꿋한 믿음으로 묵묵히, 충실히, 항구히 정주할 때 하느님 친히 그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둘째, ‘희망의 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정주의 믿음생활에 충실할 때 떠오르는 희망의 빛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희망을 숨쉬며, 하느님을 숨쉬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희망이 없는 곳, 절망의 자리 거기가 지옥입니다. 희망을 잃으면 누구나 거칠고 사나운 괴물이 될 수 있습니다. 

 

희망의 사람들은 결코 화려한 외관에 현혹되지 않고 고난의 현실에 좌절하지도 않습니다. 희망의 눈을 지닌 이들은 현실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넘어 본질을 직시하고 통찰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성전의 아름다운 돌과 자원예물에 경탄하는 제자들의 피상적 모습에서 이들의 희망이 얼마나 박약한지 깨닫습니다. 이들을 일깨우는 주님이십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예수님처럼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둘 때 제행무상諸行無常의 보이는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무시무시한 종말의 전조들로 가득합니다. 참 다양한 재난의 시작입니다. 전쟁, 반란, 큰 지진, 기근, 전염병, 곳곳에서 벌어지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 박해, 분열, 배신, 순교 등 끝이 없습니다. 

 

사실 이런 종말의 전조는 새삼스런 것이 아닙니다. 신문이나 인터넷 뉴스를 봐도 국내외할 것 없이 차고 넘치는 불편하고 불길한 사건들입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기적처럼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새삼 이런 두렵고 불안한 현실의 와중에서도 참으로 주님께 희망을 둘 때 무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미 주님 말씀은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는 지요.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주님께 희망을 둔 이들은 아무도 손댈 수 없다는 약속 말씀입니다. 참으로 주님께 희망을 둘 때 인내의 믿음이요 생명의 선물입니다. 엊저녁, 또 아침 성무일도 후렴도 이를 흥겹게 노래했습니다.

 

“참고 견디면 생명을 얻으리라.”

 

희망의 힘, 믿음의 힘이 참고 견딜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참으로 끝까지 참고 견딜 때 영적 승리의 삶이요, 영원한 생명의 선물입니다.

 

셋째, ‘사랑의 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더불어 사랑의 인생 여정입니다. 더불어 안에 홀로입니다. 연대와 친교의 사랑이 중요합니다. 고립단절이 지옥이요 괴물로 만듭니다. 사랑으로 이어져 연결되면 살고 미움으로 끊어져 단절되면 죽습니다.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이시요, 함께 하는 공동체의 도반들입니다. 주님은 물론 차별없이 인생 여정의 동료들을,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특히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실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 모두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가난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병들고 약할 때, 특히 죽음 앞에서 그대로 드러나는 우리의 가난입니다. 참으로 이런 본질적인 가난을 깨달은 이들은 더욱 주님을 이웃을, 특히 가난한 이웃을 사랑합니다.

 

이와 반대되는 이들이 바로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입니다. 참으로 회개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하느님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는 무지의 사람들, 교만과 탐욕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랑 없는 자들에 대한 심판을 말라기 예언자는 참으로 실감있게 묘사합니다. 

 

“보라, 화덕처럼 불붙는 날이 온다.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는 모두 검불이 되리니, 다가오는 그날이 그들을 불살라 버리리라. 그날은 그들에게 뿌리도 가지도 남겨두지 않으리라.”

 

참으로 단호한 심판이요 하느님의 심판이라기 보다는 스스로 악을 저지름으로 자초한 심판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하느님과 가난한 이웃을 사랑했던  우리들에게는 놀라운 약속이 실현됩니다.

 

“그러나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리라.”

 

바로 이것이 우리 사랑의 열매이자 궁극의 희망입니다. 오늘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담화문의 대미를 장식하는 성구입니다. 담화문중 감동적이 내용 일부를 나눕니다.

 

“때때로, 아주 사소한 것이 희망을 되 살릴 수 있습니다. 잠시 멈추어 미소짓고 경청하는 사랑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가난한 이들은 만나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나이가 많든 적든 외로운 사람들이며, 우리 집으로 초대하여 함께 식사를 나누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른이든 아이든 가난한 이들은 모두 친절한 말 한마디를 기대합니다. 가난한 이들은 우리를 구원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만나 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담화문처럼 구구절절 공감이 가는 가난에 대한 감동적이 글을 읽은 적이 없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친절한 사랑을 나누는 이도 아름다운 성인이고, 가난중에도 인간 존엄과 품위를 잃지 않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도 아름다운 성인입니다. 이런 성인이 되라고 불림받은 우리들입니다. 아무리 세상 종말의 험한 일들이 벌어져도 절대로 이런 의로운 이들은 하느님 친히 보호해주기고 인도해 주시기에 안전합니다. 

 

누가 성인입니까? 믿음의 사람, 희망의 사람, 사랑의 사람, 바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신망애의 사람입니다. 날마다 사랑으로 자기를 버리고, 믿음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희망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신망애의 삶에 충실하고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끝으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제 자작 좌우명 시 한 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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