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섭리다 -우연은 없다-2019.12.23. 대림 제4주간 월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Dec 23,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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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3. 대림 제4주간 월요일                                                        말라3,1-4.23-24 루카1,57-66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섭리다

-우연은 없다-

 

 

 

 

포근하기가 겨울 속의 봄같습니다. 새벽 물안개 자욱하고 얼어 딱딱했던 대지가 사랑의 봄비같은 겨울비로 젖어 촉촉합니다. 아주 오래전 애송했던 자작시 ‘봄비’가 그립게 떠오릅니다. 

 

-“마음을/촉촉이 적시는 봄비

하늘 은총/내 딸이 하나 있다면

이름은/무조건 봄비로 하겠다”-2005.4.

 

요즘 간혹 뜬금없이 이런 봄비같은 딸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곤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미소다”, 얼마전 교황님의 강론중 한 말씀이 참 신선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이다”로 바꿔도 그대로 통합니다. 바로 이런 주님의 탄생도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12월23일 마지막 ‘오 후렴’입니다. 

 

“오 임마누엘 우리의 임금이시요, 입법자이시며, 만민이 갈망하는 이요, 구속자이시니,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 주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을 목말라하는, 배고파하는 영혼들의 복된 운명입니다. 참으로 웃음이, 사랑이 절실한 시절입니다.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섭리입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웃어야 합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오래전 써놨던 시가 반가워 나눕니다.

 

-“꽃처럼 환한 웃음보다 더 좋은 선물있을까

삶은 순전히 선물이다

꽃같은 삶이다

눈여겨 보지 않으면 순식간 사라져 가는 꽃들

바로 선물 인생 아니던가

얼마나 그 많고 좋은 선물들 놓쳐버리고 살았는지

살아있는 동안은 그대로 꽃인 인생인 거다

어제의 꽃폈다 지면 또 오늘의 꽃폈다 지고---

그렇게 평생을 꽃으로 사는 거다

끊임없이 폈다 지면서 떠나는 삶이다

잘 떠날 때 아름답지 않은가

길이길이 향기로 남는다 

사랑의 향기로!”-2001.4.23.

 

늘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미소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여 ‘보속 말씀 처방전’에 늘 찍어 드리는 “웃어요!”라는 스탬프입니다. 어제 상담 대화중 드린 조언도 생각납니다. 

 

“무조건 참으십시오. 기다리십시오. 잘 들으십시오. 말많이 하지 마십시오. 화내지 마십시오. 큰 소리 치지 마십시오. 죄짓지 마십시오. 특히 약먹으면서 죄지으면 안됩니다. 죄를 짓더라도 젊고 힘있을 때지 늙고 힘없을 때는 죄의 상처나 후유증도 오래 갑니다.”

 

말씀드렸는데 이 또한 모두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뿐이 답이 없습니다. 모든 시간이 하느님 수중에 있고,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섭리안에 있다면 이렇게 할 수 뿐이 없습니다. 어제 사랑하는 지인이 공주역에서 보내준 나태주 시인의 시도 좋았습니다.

 

-“예쁘지 않은 것을 예쁘게 보아주는 것이 사랑이다

좋지 않은 것을 좋게 생각해 주는 것이 사랑이다

싫은 것도 잘 참아 주면서 처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중까지 아주 나중까지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평범하나 진솔한 사랑이 담겨 있는 글입니다.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말라기 예언자를 통한 하느님 사랑의 약속도 감동입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마침내 하느님 사랑의 약속은 실현되어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 하느님의 미소인 세례자 요한의 탄생입니다. 당대 신자들은 모두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의 재림이라 믿었습니다. 하여 모두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기뻐합니다. 즈카르야, 엘리사벳 부부의 일치된 결론의 아기 이름 안에 그대로 하느님의 사랑이 담겨 있음을 봅니다.

 

-“아닙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강경한 엘리사벳의 말에 즈카르야도 글쓰는 판을 달라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씁니다.-

 

요한은 히브리 말로 ‘하느님의 호의’ 또는 ‘하느님께서 은혜를 베푸셨다’를 의미합니다. 그대로 세례자 요한의 사명을 드러내는 이름뜻입니다. 즈카르야의 이름은 ‘하느님께서 기억하셨다’를 의미하며, 엘리사벳은 ‘하느님께서 맹세하셨다’라는 의미입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선물들이며 이들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섭리의 인물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우연도 요행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 즈카르야가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쓰는 순간 즉이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말그대로 사랑의 찬미입니다.  아마 즈카르야도 엘리사벳도 하느님 사랑의 구원 섭리를 절절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하고 말하였으니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정녕 주님의 손길은 은총의 대림시기 오늘의 우리 위에도 머물고 계십니다. 우리 역시 끊임없이 세례자 요한 대신 우리에 대해, “내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끊임없이 자문하며 하느님의 선한 뜻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하느님 사랑의 섭리를 잘 깨달아 우리 모두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미소’로 살게 하십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드십시오. 우리의 속량이 가까웠습니다.”(루카21,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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