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리'와 '거리'를 지켜내는 일 -사랑과 지혜, 겸손- 2020.1.23.연중 제2주간 목요일 ​​​​​​​

by 프란치스코 posted Jan 23,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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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3.연중 제2주간 목요일                                                   사무상18,6-9;19,1-7 마르3,7-12

 

 

 

'제자리'와 '거리'를 지켜내는 일

-사랑과 지혜, 겸손-

 

 

 

어제 반가운 부부가 수도원을 방문했습니다. 거의 30년동안 수도원과 함께 해온, 세상 한복판에서 은수자처럼 사는 부부입니다. 마침 모임을 만들어 그 명칭도 어느 수도형제의 조언에 따라, ‘예수성심형제회’라 정하니, 기존의 ‘예수성심자매회’와 쌍을 이루어 기분이 좋았습니다. 

 

참으로 세상 한 복판에서 제자리를, 거리를 잘 지키며 살아 낸 사랑과 지혜의 부부입니다. 사실 함께 가까이 살아 갈수록 서로간 제자리를, 거리를 존중함은 기본적 사랑이자 예의임을 깨닫습니다. 마침 예수성심회 회장 자매와 어제 사진을 보며 주고 나눈 카톡의 덕담도 생각납니다.

 

-“사랑하는 자매님, 어제 사진의 자매님들, 60대 전후의 나이들인데, 어쩜 소녀들처럼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워요! 하느님의 은총, 예수성심의 은총입니다!”-

“아멘. 사랑하는 신부님께서 함께 해주신 덕분입니다! 부부가 닮아 가듯 조금이라도 멘토를 닮아가려고 노력을 하니까요!”-

 

은총은 아름다움의 동의어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모두가 사랑과 지혜로 제자리를, 거리를 잘 지켜냈기에 이런 예쁘고 사랑스런 모습일 것입니다. 참 사랑은 지혜입니다. 새삼 참 사랑은, 참 지혜는, 참 겸손은 한결같이 제자리를, 거리를 잘 지켜내는 침묵과 고독의 능력임을 깨닫습니다. 아주 예전에 써놓았던 글도 생각납니다.

 

-“사랑은 하느님 안에서

제자리를 지켜내는, 거리를 견뎌내는

고독의 능력이다

지켜냄과 견뎌냄의 고독 중에

순화純化되는 사랑, 깊어지는 사랑, 하나되는 사랑이다”-1997.3

 

옛 하느님을 찾아 사막에 갔던 수도승들은 침묵과 고독중에 언제나 세상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내면을 깊이했습니다. 이래야 세상의 빛이,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속화俗化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성화聖化하는 사랑이 되어 살 수 있습니다. 삶의 넓이에서가 아닌 깊이에서 만나는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이래야 나도 살고 너도 삽니다. 토마스 머튼의 ‘현대인들에게 고독은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다’라 언급한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은 완전히 슈퍼 스타입니다. 참으로 분주한 예수님 하루 일상의 요약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치유와 구마활동으로 인기의 절정에 있으며 열광熱狂하는 군중들의 한복판에 있습니다. 

 

바로 삶의 위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이런 덧없는 인기나 열광에 현혹되지 않고 제자리를 지켜내고 거리를 견뎌냅니다. 사람들이 경계도 없이 하두 몰려 드니 마침내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 이르시며 거리를 유지하십니다. 제자리를 지켜내고 거리를 견뎌내는 예수님의 필사적 노력입니다.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시는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사람들의 열광을 경계함이 잘 드러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메시아 관이 오해되고 왜곡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뿌리없이는 꽃도 없습니다. 꽃같은 영광만의 메시아를 추구하는 천박한 사람들이 필히 깨닫고 체험해야 할, 뿌리같은 깊이의 수난과 죽음의 메시아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없이는 부활의 영광도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파스카 영성의 핵심입니다. 

 

사무엘 상권에서 사울의 결정적 실패는 그가 제자리를, 거리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다윗이나 그의 아들 요나단의 사랑과 지혜가 사울을 능가합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한결같은 우정의 사랑도 감동입니다. 

 

무엇보다 사울은 질투심의 극복을 통해 자기를 이김으로 제자리를 지켜내고 거리를 견뎌냈어야 했습니다. 자신의 존엄한 품위를 지켜냈어야 했습니다. 진짜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나입니다. 남한테는 져도 나한테는 이겨야 진짜 승자입니다. 다음 대목에서 누구나 사울의 처지라면 그 심정에 공감할 것입니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 사울은 이 말에 몹시 화가 나고 속이 상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다윗에게는 수만 명을 돌리고 나에게는 수천 명을 돌리니, 이제 왕권말고는 더 돌아갈 것이 없겠구나.” 그날부터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게 되었다.-

 

사실 사울의 처지라면 누구나 인지상정 공감할 것입니다. 이런 미래 권력앞에 현재 권력은 늘 초조하고 쫓기는 심정이기 마련입니다. 하여 2인자를 용납하지 않는 권력의 속성을 이해하게 됩니다. 여기서 시작되는 사울과 다윗의 내적 불화와 갈등입니다. 다윗과 요나탄의 겸손과 지혜로 일단 위기는 벗어 났습니다만 사울은 끝내 이점을 넘어서 제자리를 지켜내지 못했고 거리를 견뎌내지 못함으로 자멸自滅에 이르게 됩니다.

 

참 사랑은, 참 지혜는, 참 겸손은 끝까지 제자리를 지켜내는, 거리를 견뎌내는, 자신의 존엄한 품위를 지켜내는 고독과 침묵의 능력입니다. 이 또한 은총입니다. 이래야 이런저런 유혹에 빠지지 않고 서로 평화롭게 공존하며 다양성의 일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서로의 제자리와 거리를 존중하며 평화롭게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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