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의 기쁨, 찬미의 힘, 찬미의 축복 -하느님 중심의 삶- ​​​​​​​2020.2.7.연중 제4주간 금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Feb 0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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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2.7.연중 제4주간 금요일                                                                   집회47,2-11 마르6,14-29

 

 

 

찬미의 기쁨, 찬미의 힘, 찬미의 축복

-하느님 중심의 삶-

 

 

 

어제부터 제1독서는 열왕기상권의 시작으로 다윗의 죽음이 그 주제였고 오늘 제1독서는 집회서중 다윗의 행적을 요약합니다. 내일부터 제1독서는 다시 열왕기상권이 계속되고 다윗에 이어 솔로몬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오늘 제1독서의 메시아 다윗과 복음의 주인공 예언자 세례자 요한이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예수님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분들로 이분들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철저히 ‘하느님 중심의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 사제생활중 강론에서 참 많이 사용했던 주제중 하나가 ‘삶의 중심’, ‘하느님 중심의 삶’이었습니다. 믿는 이들의 삶의 중심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이 분명하고 확고할수록 내적안정과 평화요, 이런 하느님 중심에 뿌리 내리지 못한 삶일 때 점증하는 두려움과 불안이요, 표류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다윗의 하느님 중심의 삶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다윗이 얼마나 하느님을 사랑하는 하느님 중심의 삶인지 깊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그는 모든 일을 하면서 거룩하고 지극히 높으신 분께, 영광의 말씀으로 찬미를 드렸다. 그는 온 마음을 다해 찬미의 노래를 불렀으며, 자신을 지으신 분을 사랑하였다.---다윗은 축제를 화려하게 벌였고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미하고, 그 찬미가 이른 아침부터 성소에 울려 퍼지게 하였다.’

 

찬미의 사람, 다윗이야말로 우리 수도자의 모범입니다. 사랑의 찬미요, 하느님 사랑은 저절로 하느님 찬미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찬미와 감사는 영혼의 양날개입니다. 수도자는 영혼에 찬미와 감사의 양날개를 달고 하느님의 창공을 나르는 영적 자유인입니다.

 

찬미의 기쁨, 찬미의 힘, 찬미의 축복, 찬미의 아름다움 등 끝이 없습니다. 누가 무슨 맛으로, 기쁨으로, 재미로 사느냐 묻는다면 저는 지체없이 찬미의 기쁨, 맛, 재미로 산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기에 ‘찬미’이지 하느님을 모르면 평생 ‘찬미’도 모르고 참 허망하고 억울하게 세상 마칠 수 있겠습니다. 세상 노래들 그렇게 많이 부르면서 하느님 찬미의 노래, 영혼의 노래를 부르지 못했다면 그 인생 얼마나 허망하겠는지요. 

 

삶의 무지無知와 허무虛無, 무의미無意味에 대한 답도 ‘사랑의 찬미讚美’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찬미가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하면서 찬미의 빛이 허무와 무지, 무의미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찬미의 힘이, 찬미의 축복이 대단합니다. 바로 다음 다윗에 대한 묘사가 하느님 찬미의 축복을 상징합니다. ‘다윗은 염소 새끼들과 놀듯 사자들과 놀고, 양들 가운데 어린양과 놀 듯곰과 놀았다.’ 이런 평화의 축복은 그대로 찬미의 축복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전사로서 골리앗의 교만을 꺾고 전쟁에 승리하여 영화로운 왕관을 쓰게 된 것도 찬미의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 역시 하느님 중심의 삶에 투철했던 분이었습니다. 이 두분들 역시 찬미의 사람들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사실 하느님 찬미는 믿는 이들의 영적 본능입니다. 누구나의 마음 깊이에는 하느님 사랑의 찬미의 갈망이 내재해 있는 법입니다. 찬미의 기쁨만이 영적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말하며 불안으로 전전긍긍합니다. 헤로데 역시 내심으로 이들이 하느님 중심의 하느님의 사람들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했기에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용기있게 충언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악은 무사유無思惟에 기생합니다. 하느님 중심이 없는 생각이 없는 무사유의 사람들에 기생하는 악입니다. 바로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 두분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헤로데, 헤로디아,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바로 이런 사람들의 좋은 본보기입니다. 사람들이 하느님 중심의 삶을 떠날 때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 지 보여주는 좋은 증거입니다. 

 

아마 이들은 자기들의 악행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 몰랐을 것입니다. 헤로데의 우유부단함이나 경거망동 역시 그가 얼마나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증거입니다. 참으로 이들을 통해 인간의 무지無知가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죄罪요 악惡이요 병病인지 깨닫습니다. 무지한 사람은 알려줘도 모릅니다. 하여 회개의 필요성이 절실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벗어날 때 누구나의 가능성이 바로 무지의 악, 병, 죄에 빠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저절로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하고 충실할수록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닮은 ‘참나(眞我)’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우리 수도자들이 매일,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는 얼마나 고마운 축복인지요!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무지의 병’을 치유해주시고, ‘찬미의 사람’이 되어 하느님 중심의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살아계시다! 나의 반석께서는 찬미받으시리니 내 구원의 하느님께서는 드높으시다.”(시편18,4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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