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나게 하는, 어둠을 밝히는 사람들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2020.2.9.연중 제5주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Feb 0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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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2.9.연중 제5주일                                                           이사58,7-10 1코린2,1-5 마태5,13-16

 

 

 

살맛나게 하는, 어둠을 밝히는 사람들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가톨릭 신문을 읽던 중 다음 세 말마디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단순하게 단단하게 단아하게’라는 박노해(가스파르) 시인의 사진전 제목입니다. 이어지는 글도 좋았습니다.

 

“최고의 삶의 기술은 언제나 가장 단순한 것으로 가장 풍요로운 삶을 꽃피우는 것이니, 하여 나의 물음은 단 세가지다. 단순한가 단단한가 단아한가. 일도 물건도 삶도 사람도. 내 희망은 단순한 것, 내 믿음은 단단한 것, 내 사랑은 단아한 것. 돌아보면 그랬다. 

가난이 나를 단순하게 만들었고, 고난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고, 고독이 나를 단아하게 만들었다. 그것들은 나를 죽이지 못했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들은 나를 더 푸르게 하였다. 가면 갈수록 나 살아있다. 단순하게 단단하게 단아하게!”

 

단순한 희망, 단단한 믿음, 단아한 사랑의 삶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참으로 한결같이 깨어있는 살아있는 매력적인 삶입니다. 참으로 희망할 때 단순한 삶이요, 참으로 믿을 때 단단한 삶이요, 참으로 사랑할 때 단아한 삶이겠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단순하고 단단하고 단아한 삶이겠습니까? 오늘 복음 말씀처럼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사는 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신자들의 삶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무 분명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믿는 이들의 신원입니다. 과연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단순하고 단단하고 단아한 삶입니까? 세상의 소금이라 했습니다. 세상의 빛이라 했습니다. 세상이 없는 소금과 빛은 무의미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속의 소금이요, 세상속의 빛입니다.

 

소금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녹아 스며들어 부패하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이요 맛을 내는 역할입니다. 참으로 세상의 부패를 막는, 세상에 살맛을 내는 소금 역할을 하는 신자들인 우리라는 것입니다. 이런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어떻게 됩니까? 쓸모가 없어 버리게 됩니다. 

 

“맛이 갔다!” 종종 듣는 말입니다. 음식은 맛이가면 버리기라도 하는데 사람은 맛이 가면 버릴 수도 없다는 말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사람이 변질變質, 변절變節, 변심變心, 변덕變德으로 맛이갈 때 존재이유의 상실입니다. 

 

“그러나 소금이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도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일 따름이다.”

 

이런 삶이라면 너무 비참합니다. 아무리 풍족한 의식주의 외적 삶이라 해도 제맛을 잃은 이런 내적 삶이라면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아무리 세월 흘러 나이들어도 어떻게 변질되지 않고 세상의 소금처럼 제맛을 잃지 않고 단순하게 단단하게 단아하게 살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화두처럼 주어지는 물음입니다.

 

다음은 소금에 이어 빛입니다. 세상속의 소금이듯 세상속의 빛입니다. 세상이 없는 빛은 존재이유의 상실입니다.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같은 존재가 바로 우리 믿는 사람들입니다. 평상시는 너무 흔하고 당연한듯 까맣게 잊고 지내지만 없으면 당장 필요로 하는 소금이요 빛입니다. 그러니 세상에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는 이들이 없다면 세상은 어떻게 되겠는지요? 세상은 날로 부패하고 세상은 날로 어두워지는 절망적 현실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세상의 빛임을 선언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바로 ‘산위에 자리잡은 고을’의 빛같은 존재가, 집안을 밝히는 ‘등경위에 놓여진 등불’같은 존재가 바로 우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소금과 빛은 바로 교회의 존재이유입니다. 세상의 중심에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우뚝 자리 잡은 여기 정주의 요셉수도원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살 때 저절로 복음 선포의 선교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우리의 착한 행실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우리의 신원입니다. 세상 탓, 남 탓할 것 없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 나부터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참으로 아름답게 한결같이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이 소금이요 빛입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이 세상의 소금이요 빛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 빛이 되기 위한 일차적 과제는 말씀 공부와 실천에 있습니다. 참으로 진짜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신 예수님과 일치에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신 예수님을 사랑하여 닮아갈수록,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록 저절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역할을 잘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여 우리가 끊임없이 바치는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 기도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끊임없이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신 주님과의 깊어지는 일치로 우리는 썪지 않고, 어두워지지 않고,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살기위한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 예수님과 사랑의 일치입니다. 바로 이의 빛나는 모범이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로 다음 고백을 통해 바오로 사도의 주님과의 일치가 얼마나 깊은지 깨닫게 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려고 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세상의 소금이자 빛이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과의 일치에 있음을 봅니다. 사실 우리에게서 소금인 예수님이 빠져 버리면 우리는 곧 부패하게 되고, 빛이신 예수님이 빠져 버리면 마음도 몸도 온통 어둠 속에 빠져들게 됩니다. 

 

허무와 무지, 무의미의 어둠이 우리를 지배할 것이고 온갖 해로운 영적 바이러스들이, 더러운 영들이 우리를 차지할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일치만이 우리를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게 합니다. 하여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세상의 소금이자 빛이신 예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약하고 두려움이 많고 많이 떨었던 약한 바오로가 어떻게 그렇게 강한 사람이 되어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 수 있었을까요? 바로 성령의 힘, 하느님의 힘입니다. 바오로의 고백을 들어 보세요.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이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되어 성령의 힘, 하느님의 힘으로 살아갈 때 어눌함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공자의 ‘교언영색 선의인(巧言令色, 鮮矣仁), 말재간이 번지르한 달변에 안색을 잘 꾸미는 사람치고 어진 사람은 드물다.’는 말씀도 생각이 납니다. 

 

참으로 진짜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과 하나될수록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잘 살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배치에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 앞에 진복팔단의 참행복 선언이 있습니다. 참 행복의 진복팔단, 바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슬퍼하는 자, 온유한 자,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자, 자비로운 자, 마음이 깨끗한 자. 평화를 이루는 자,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자, 바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처럼 살아갈 때 우리는 예수님과 일치가 되고 하늘 나라는 우리의 것이 되며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렇게 살아갈 때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고 참 행복한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갈 때 참 단순하고 단단하고 단아한,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이겠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신 영원한 롤모델은 이사야 예언자입니다. 주님은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 살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참된 단식이란 주제에 이어지는 오늘의 말씀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이사야 예언자들 통해 쏟아내는 하느님의 말씀이 오늘 이사야서 제1독서를 통해 제시됩니다. 통째로 인용합니다. 이렇게 사랑과 정의, 공정을 살 때, 진짜 세상의 소금이자 빛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실천이 없는 우리의 유약한 사랑을 부끄럽게 하는 말씀입니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 네 가운데에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리는 것,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주는 것,

 

그러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 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주리라. 그때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얼마나 확신에 넘치는 힘차고 고무적인 하느님 말씀인지요. 사랑은 감상이나 낭만이 아닙니다. 구체적 오늘 지금 내 삶의 현장에서 사랑과 정의의 실천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참된 단식이요 세상의 소금이자 빛으로 사는 구체적 사랑 실천의 처방입니다. 녹아 스며드는 소금처럼, 자기를 태워 빛을 내는 촛불처럼 사랑 실천의 소금이요 빛입니다. 새삼 끊임없이 녹아 스며들어 사라지는 소금의 원천이, 끊임없이 타오르는 빛의 원천이 주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 예수님 안에 정주할 때 영원히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바로 믿는 이들인 우리의 신원이자 존재이유입니다. 이런 삶자체가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과 영광이요 복음선포의 선교가 됩니다. 세상 탓, 남 탓할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나부터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사는 것입니다. 참으로 단순한 희망, 단단한 믿음, 단아한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선적인 것이 세상의 소금이자 빛이신 예수님과 사랑의 일치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깨어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살도록 부단히 격려하고 자극합니다. 살맛나게 하는 세상의 소금으로, 어둠을 환히 밝히는 세상의 빛으로 살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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