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한결같이 사랑합시다 -하느님 중심의 삶- 2020.2.15.연중 제5주간 토요일 ​​​​​​​

by 프란치스코 posted Feb 15,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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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2.15.연중 제5주간 토요일                                                1열왕12,26-32;13,33-34 마르8,1-10

 

 

 

하느님을 한결같이 사랑합시다

-하느님 중심의 삶-

 

 

 

이런저런 묵상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어제는 집무실을 정리하면서 ‘세속을 떠난 산중山中 수도원내에서도 복잡혼란한 세속世俗을 살 수 있겠고, 세속 한 복판에서도 단순소박한 수도원같은 생활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수도복을 입었어도 마음이 세상으로 가득하다면 거기가 세속이요, 수도복을 입지 않았어도 마음이 하느님으로 가득하다면 거기가 수도원이겠구나.’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참으로 깨어 끊임없이 비우고 버리지 않으면 갈수록 몸도 마음도 짐도 무거워지고 노화老化와 병마病魔로 인해 삶은 더욱 바빠지고 힘들어 질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할말도 적어지고 부정적인 말을 안하려 하니 할말이 없어집니다. 할말은 모두 온 마음을 담아 모두 성무일도와 미사를 통해 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요즘 뉴스 보기가 겁납니다. 온통 부정적인 뉴스로 가득합니다. 얼마나 탁한 사회분위기인지 착하고 약하고 능력이 부족한 보통사람들이 참 살아가기 힘든 세상입니다. 흡사 세상속에 갇힌,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지옥속의 불쌍한 사람들같습니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 못지 않은 분열과 분쟁과 차별의 바이러스요, 요즘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리는데 온갖 쏟아내는 사악邪惡한 생각과 언행들도 미세먼지 이상으로 사회를 오염시키는 느낌입니다. 

 

갈수록 늘어가는 일회용 쓰레기들이요 쓰레기같은 말과 글들도 차고 넘칩니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인스탄트 소모품 쓰레기처럼 취급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전국토가, 전세계가 쓰레기장이 될 것 같습니다.

 

참으로 많은 이들이 자기를 잃고, 잊고, 생각없이 막, 함부로, 되는대로 무책임하게 살아갑니다. 인품, 품위, 품격, 기품을 찾아 보기 힘듭니다. 너나 할 것 없이 힘들다고 아우성들입니다. 여전히 반복되는, 아니 갈수록 악화되는 세상이요 이렇게 살다가는 지속가능한 세상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참으로 사람들뿐 아니라 자연 피조물들을 ‘아끼고 보살피는 일’이 얼마나 본질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깨어 본연의 자세로 끊임없이 비우면서 단순소박하게 근면검소하게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여 믿는 이들은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새로이 하며 하느님을,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이냐 ‘세상 중심의 삶’이냐 둘 중 하나입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듯이 두 중심의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제1독서 열왕기 상권의 예로보암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사무엘상권에서 시작되어 사무엘하권에 이어지는 열왕기상권 온통 전쟁 이야기며 반복되는 죄악의 세상이요, 오늘날 역시 똑같습니다. 이 모두가 하느님을 잊은 무지無知와 탐욕貪欲의 소산인데 과연 인류의 영적진보가 가능한지 묻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살리는 확대 심화되는 사회복지 제도가 고맙고 희망의 표지가 됩니다. 제1독서 마지막 절이 충격적으로 깊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예로보암 집안은 이런 일로 죄를 지어, 마침내 멸망하여 땅에서 사라졌다.'

 

예로보암의 멸망으로 치닫는 죄악의 행태를 보십시오. 베텔에, 단에 금송아지들에 제물을 바치게 하고 일반 백성들 가운데서 사제들을 임명합니다. 완전히 하느님을 떠난 길을 잃어버린 ‘세상 중심의 사람들’입니다. 하느님 중심이 아닌 우상들 중심의 삶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애당초 회개도 겸손도 없고 나를 아는 지혜도 없습니다. 

 

하여 사람이 아닌 괴물怪物도, 악마惡魔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라 하여 다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어제 밤, 어느 자매가 30살 먹은 아들 때문에 울면서 전화후 메시지를 보냈고 미사를 부탁했습니다.

 

“신부님 아들이 아니라 웬수예요. 차라리 목숨 끊고 죽으라 했어요. 사기꾼 입만 열었다 하면 거짓말만해요.”

 

참으로 어려서부터 하느님 중심의 삶의 생활화, 습관화, 일상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해인총림 방장스님의 기해년 동안거 반결제 법어 서두에 인용된 선시가 우리의 끝기도 찬미가와 일맥상통했습니다. 부처를 ‘주님’으로 바꿔 우리 식으로 읽어도 무방하겠습니다.

 

-“밤마다 부처를 안고 자고, 아침마다 부처와 함께 일어나네.

앉으나 서나 늘 따라 다니고, 말할 때도 침묵할 때도 함께 하도다.”

 

우리의 끝기도 찬미가 다음 연도 이와 흡사합니다.

 

-“우리는 잠을 자도 주님과 함께, 꿈에도 당신만을 뵙게 하소서.

언제나 한결같이 당신 영광을, 새는 날 밝아 올제 찬미하리다.”-

 

바로 자나 깨나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하여 전삶의 기도화를 통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위해 끊임없이 바치는 공동전례기도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하느님 중심의 삶의 모범입니다. 예수님의 성체성사가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하나로 관통하고 있음을 봅니다. 참으로 성체성사가 하느님 중심의 삶에 얼마나 결정적 역할을 하는지 깨닫습니다.

 

광야 한복판 절망적 상황을 오아시스 천국으로 변화시키는 주님의 성체성사의 기적입니다. ‘과거’ 이집트 탈출시에는 만나로 백성을 살려주셨던 하느님은 ‘현재’ 주님의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를 살려 주십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빵의 기적은, 우리가 매일 거행하는 이 거룩한 성체성사는 이사야서(25,6-8)의 ‘미래’의 풍요를 예시합니다.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그분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덮개를 없애시리라.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주시리라.”

 

이런 미래의 주님의 영광스런 하늘 나라 잔치를 앞당겨 맛보는, 체험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를 정화淨化하고 성화聖化하며, 하느님 중심中心의 삶을 확고히 해주고, 근면검소勤勉儉素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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