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의 여정, 파스카 여정 -만남, 축복, 도반, 약속, 말씀, 떠남-2020.3.8.사순 제2주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Mar 0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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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3.8.사순 제2주일                                                   창세12,1-4ㄱ 2티모1,8ㄴ-10 마태17,1-9

 

 

 

떠남의 여정, 파스카 여정

-만남, 축복, 도반, 약속, 말씀, 떠남-

 

 

 

전대미문의 코로나 사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전세계로 확산되는 추세입니다. 새삼 깨닫는 바 큽니다. 인류에게 주는 경고이자 회개하라는 표징입니다. 인류는 피아彼我도 좌우左右도 이념과 국적도 상관없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운명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보이는 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인류 공동의 적’과의 힘든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뜻합니다. 핵무기를 비롯한 참으로 가공할 무기들이 이젠 쓸모 없어졌습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웃고 있습니다. 이젠 보이는 무력의 전쟁이 아닌 보이지 않는 전쟁으로 인류가 공멸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작금의 코로나 19 바이러스 전염병은 물론 무수한 병과의 전쟁, 기후 위기와의 전쟁, 미세먼지와의 전쟁, 범죄와의 전쟁, 빈부격차 불평등과의 전쟁등 끊임없이 이어지는 때로는 보이지 않는, 정체불명의 ‘악惡과의 전쟁’입니다. 이들 대부분 잘 들여다 보면 천재天災라기 보다는 인재人災입니다. 인간의 무지無知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결국 한마디로 요약하면 ‘무지無知와의 전쟁’입니다. 탐욕, 교만, 두려움, 어리석음, 무감각, 무자비, 허무, 광신, 맹신, 자기 중심의 이기주의, 군비경쟁등 모두가 무지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참으로 무지에 대한 끊임없는 각성覺醒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무지에 대한 끊임없는 각성의 회개와 더불어 연민, 연대, 지혜, 겸손이 뒤따릅니다. 과연 무지와의 끝없는 전쟁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까요?

 

바로 오늘 말씀이 답을 줍니다. 무지의 악이자 병에 대한 근원적 처방은 단하나 ‘사랑의 하느님뿐!’입니다. 하느님을 떠난 재앙이 바로 끊임없는 무지의 전방위적 공격입니다. 참으로 겸손히 떠남의 여정, 파스카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무지로부터의 치유이자 해방이자 자유입니다. 

 

첫째, 만남입니다.

만남의 선물입니다. 참 소중한 만남들입니다. 주님과의 만남, 사람과의 만남입니다. 과거 향기로웠던 만남의 기억이 미래의 꿈을, 희망을 만듭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창세기에서 아브람과 하느님과의 만남이, 또 복음의 제자들이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주님과의 만남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일종의 신비체험과 같은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바로 이런 체험이 떠남의 여정, 파스카 여정에 희망과 꿈이 되고 활력의 원천이 됩니다. 이런 체험은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롭습니다(ever old, ever new)’. 결코 잊을 수 없는 참으로 복된 추억입니다. 참으로 이런 체험의 추억을 지닌 이들이 영적 부자입니다. 이런 좋은 추억들에는 알게 모르게 주님께서 꼭 함께 하십니다.

 

어제의 행복했던 추억의 체험을 잊지 못합니다. 아주 오래전 옛 제자로부터의 전화를 받고 사진첩을 찾아 44년전 초등학교 교사시절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전송했습니다. 참 새로운 감동의 사진이었습니다. 지금은 50대 후반의 제자들의 13세 5학년때의 사진, 이때 제 나이 28세였습니다. 대체로 가난했지만 평화롭고 행복한 아이들과 저의 표정들을 보면서 ‘오래된 미래’는 이런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런 과거가 행복한 미래의 꿈과 희망이 됩니다. 참으로 좋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추억들이 얼마나 미래의 꿈과 희망에 직결直結되는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향기롭고 행복했던 만남의 기억이나 추억이 없이는 미래의 꿈도 희망도 없다고 봅니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들, 영광스러운 변모의 주님과의 만남의 추억은 파스카 여정중에 끊임없이 미래의 꿈과 희망을 만들어 줬을 것입니다. 창세기의 아브라함 역시 주님과의 만남의 추억은 늘 새로운 용기의 원천이 되었고, 미래의 꿈과 희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의 행복이 미래의 행복을 보장함을 깨닫습니다.

 

둘째, 축복입니다.

축복의 선물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축복입니다. 우리 모두 이미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축복 받은 존재들입니다. 창세기의 축복받은 아브라함이 바로 우리 모두 축복 받은 존재임을 깨우칩니다.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는 아브람입니다. 아브람을 통해 새롭게 구원 역사를 펼치시는 주님은 오늘 우리를 통해서도 복을 주시며 새롭게 시작하도록 하십니다. 아브람의 ‘너’ 대신 오늘의 ‘내 이름’을 넣어 묵상해도 은혜로울 것입니다.

 

“나는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모든 이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잘 들여다보면 아브라함뿐 아니라 우리 하나하나가 복받은 복덩어리 존재들입니다. 매일 미사를 통해 평화의 복을 받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예수님과의 일치를 이뤄주는 미사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가 감격에 벅차 고백하는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실 때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무지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다음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 자체가 구원의 복음이요 하늘 나라입니다.

 

“이제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환히 드러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주셨습니다.”

 

셋째, 도반입니다.

도반의 선물입니다. 빨리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도반들과의 연대가 절대적입니다. 떠남의 여정, 파스카의 여정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의 여정’입니다. 형제들 도반과 더불어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이보다 더 큰 위로와 힘은 없습니다. 고립단절의 혼자보다 더 큰 재앙은 없습니다. 고독과 고립은 엄연히 다릅니다. 법정 스님의 말씀입니다.

 

“홀로 사는 사람이 고독할 수는 있어도 고립되어서는 안된다. 고독에는 관계가 따르지만, 고립에는 관계가 따르지 않는다.”

 

아브람이 떠날 때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은 물론이고 보이는 도반인 롯과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복음의 세 제자들, 베드로 야고보 요한 늘 함께 했던 여정의 도반들이자 영원한 도반이자 스승인 예수님과 늘 함께 했습니다. 우리 역시 똑같습니다. 함께 사는 공동체 형제 도반들이 있고, 그리고 우리의 파스카 여정중 늘 함께 하시는 영원한 도반이자 스승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넷째, 약속입니다.

약속의 선물이자 희망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 바로 우리에게 약속의 선물이자 희망이 됩니다. 창세기의 주님 역시 아브람에게 약속을 선물하십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바로 보여줄 땅이 아브람의 순례 여정의 궁극의 목적지입니다. 우리에게는 바로 하늘 나라가 약속의 땅입니다. 수난과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 바로 약속의 땅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우리 모두 하느님께 부르심의 축복의 약속을 받은 은혜로운 존재임을 선포합니다. 티모테오 제자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느님께 부름 받아 구원 받고 거룩히 살게 되었다는 자체가 축복이요 약속의 성취입니다. 언젠가의 하늘 나라가 아니라 이미 파스카 여정 중 하늘 나라의 약속의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부활의 약속의 기쁨을 앞당겨 사는 은총의 사순시기가 바로 파스카 여정을 압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의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사순절 동안 모든 이들은 자신의 생활을 순결하게 보존하며--- 자기 육체에 음식과 잠과 말과 농담을 줄이고 영적 갈망의 기쁨으로 거룩한 부활 축일을 기다릴 것이다.”

 

다섯째, 말씀입니다.

말씀의 선물입니다. 말씀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말씀과 만나야 영혼도 삽니다. 창세기의 아브람은 하느님과의 대화를 통해 말씀을 들으며 삶을 새롭게 하지 않습니까? 말씀은 생명이요 빛이요 영입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는 우리들입니다.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말씀의 빛입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처방은 진리와 생명의 말씀뿐입니다. 오늘 주님은 복음에서 세 제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에게 말씀을 선물하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예수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주님의 현존입니다.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은 우리 발에 등불, 우리를 비추는 빛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빛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말씀 따라 갈 때 성공적 파스카 여정이 됩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역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넘어지면 즉시 일어나 파스카 여정에 오르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십자로 중앙 예수님 부활상 아래 바위판 새겨진 말씀입니다.

 

여섯째, 떠남입니다.

만남에 이어 떠남의 기쁨이요 선물입니다. 만남의 끝은 새로운 떠남의 시작입니다. 41년전 초등학교 6학년 제자들 졸업식 때 칠판에 썼던 글귀를 어제 사진에서 보고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졸업은 끝이 아니라 새출발, 희망찬 미래를 향해 힘껏 노력하자!” 

 

참으로 산티아고 순례중 가장 기뻤던 순간이 새벽마다 일어나 길을 떠날 때였습니다. 만남의 여정은 바로 떠남의 여정, 파스카 여정이 됩니다. 물도 고이면 썩습니다. 늘 흐를 때 맑은 물입니다. 집착함이 없이 끊임없이 떠나는 여정이 아름답습니다. 성서의 인물들 한결같이 파견받아 떠나는 떠남의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모범입니다.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납니다. 산에 올라 영광스러운 변모를 체험했던 세제자들 산에서 내려와 떠남의 여정에 오릅니다. 집착하여 머물려는 베드로의 모습 역시 우리의 면모입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떠남의 여정에 오를 것을 명하십니다. 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우리의 여정은 끊임없는 떠남의 여정입니다.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지나가는 것에 집착할 때 고통입니다. 그러니 밖으로는 하느님을 기다리는 ‘정주의 山’같아도 안으로는 끊임없이 하느님 향해 흐르는 ‘맑은 강江’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래야 아름답고 향기로운 삶입니다. 꼰대소리 듣지 않습니다.

 

이 거룩한 사순시기, 떠남의 여정, 파스카 여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을 만난 우리 모두에게 축복과 더불어 약속을 선물하시고 당신 말씀에 순종하며 떠남의 여정에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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