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성인聖人을 목표로 삽시다 -참 좋은 삶과 죽음-2020.4.5.주님 수난 성지 주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Apr 05,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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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4.5.주님 수난 성지 주일                                              이사50,4-7 필리2,6-11 마태26,14-27,66

 

 

 

하루하루 성인聖人을 목표로 삽시다

-참 좋은 삶과 죽음-

 

 

 

사순시기도 이제 막바지에 이르러 성주간이 시작되고 오늘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이 되었는데도 코로나 사태로 인해 전 세계에는 ‘영적 어둔 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회개와 정화의 영적 어둔 밤입니다. 

 

광야 여정시 불평과 원망의 죄를 짓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이 보낸 불뱀에 물려 죽자 모세가 기둥에 달아 놓은 구리뱀을 보자 회개하여 구원 받았듯이, 우리도 코로나로 인한 재앙에서 회개할 때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코로나 역시 믿는 이들에게는 회개의 표징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느님의 뜻은 아니지만 하느님의 허락없이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지난 밤, 들은 알퀸 아빠스의 갑작스런 죽음 소식은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잠이 오지 않고 참 많이 죽음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아주 예전 함석헌 선생이 친구 목사 부인의 장례식때 설교 내용중 친구 목사에게 했다는 다음 대목이 떠올랐습니다. 

 

“당신 아내는 당신이 죽였습니다. 목사라는 당신이 죽음이 뭔지 모르기 때문에, 죽음이 뭔지 깨닫게 하기 위해 당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내를 하느님이 데려 가신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당신 아내는 목사인 당신이 죽인 것입니다.”

 

의미심장한 대목입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혼자가 아닙니다. 살아있는 이들 역시 사랑했던 죽은 이들의 이런저런 추억의 짐을 지고 평생 살아갑니다.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희망을 놓치 않고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얼마나 살고 싶어 하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지요. 이런 죽은 이들을 가슴에 묻고 아프게 살아가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겠는지요. 죽어 세상 떠난지 오래 되었어도 기억 속에 살아 있어 끊임없이 회개를 촉발시키는 죽어서 살아있는 분들입니다.

 

얼마전 31년전 1989년 제 사제서품 동영상 시청도 충격적 체험이었습니다. 당시 젊게 보였던 많은 분들이 참 많이도 고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지나갑니다. 우리도 언젠가 지나면 사라질 것입니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지구라는 공동 집에 머물다 떠날 나그네 손님들인 우리들입니다. 앞으로 10년, 20년, 30년후 지나면 여기 형제들중 몇 명이나 남아있을 까요?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얼마전 면담성사가 없다는 공지문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들어 온 60대 중반의 자매도 잊지 못합니다. 하나뿐이 28살 아들이 우울증으로 며칠전 아파트에서 뛰어 내려 자살하여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수도원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울면서 하는 말이, “사랑한다!”는 말 한 번 하지 못한 것이 참으로 후회된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저도 알퀸 아빠스 떠나던 전날 카톡 사진 한번 함께 찍어야 겠다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참 아쉽습니다.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란 질문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란 질문에 직결됩니다. 오늘 두개의 독서와 마태오의 긴 수난복음이 우리의 삶과 죽음에 참 좋은 가르침을 줍니다. 

 

어떻게 하면 참 좋은 삶과 죽음을, 선물같은 삶과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하루하루 성인을 목표로 사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강론 제목이기도 합니다.

 

첫째, 기도입니다.

요즘 코로나 사태로 ‘거리 두기’란 말이 널리 회자되고 있습니다. 거리는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 예의의 표지입니다. 참으로 영적 거리는 더욱 필요로 합니다. 거리 두기가 주는 역설적인 가르침은 주님과 더욱 가까워 지라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기도로 주님과의 관계가 날로 깊어질 때 이웃간의 내외적 거리 두기도 성공적이 될 것입니다. 오래전 써놨던 사랑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사랑은 하느님 안에서

제자리를 지켜내는, 거리를 견뎌내는 고독의 능력이다

지켜냄과 견뎌냄의 고독중에

순화되는 사랑, 깊어지는 사랑, 하나되는 사랑이다”-1997.3.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삽니다. 잘 살기 위해, 잘 죽기 위해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하느님과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깊이하는 데는 기도뿐이 없습니다. 죽음에 대한 궁극의 답도 하느님과의 소통이 기도뿐입니다. 기도도 평생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참으로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깊은 친교를 살았던 제1독서 이사야서에 나오는 주님의 종의 세 번째 고백은 그대로 우리의 고백이 됩니다.

 

“주 하느님께서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기도는 주님과 소통의 대화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우선적으로 경청할 때 비로소 진정한 기도도 시작됩니다. 오늘 수난복음에서 주님께서 온갖 고통을 묵묵히, 한결같이 견뎌낼 수 있었던 비결도 기도에 있음을 봅니다. 게세마니 동산에서의 기도 안에 예수님의 삶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아버지, 이 잔이 비켜 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얼마나 간절한 기도인지요! 평생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 온 주님의 삶이 결집되어 있는 기도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인 제자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요, 이런 우리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너희는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

 

마지막 임종시 주님의 “엘리 엘레 레마 사박타니?;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란 탄원의 기도도 역설적으로 하느님께 대한 예수님의 깊은 신뢰와 희망을 반영합니다. 참으로 죽음에 임박해도 부를 수 있는 이름이, 하느님 이름이 없다면 얼마나 안타깝겠는지요. 소화 데레사의 마지막 임종기도,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란 고백도 생각납니다.

 

기도중의 기도가 우리가 평생 매일 끊임없이 바치는 시편성무일도와 이 거룩한 미사입니다. 시편보다 더 좋은 시도 없고, 참 좋은 ‘하느님의 시詩’가 미사입니다. 독일의 시성詩聖인 괴테의 말입니다. “좋은 시는 어린이에게는 노래가 되고, 청년에게는 철학이 되고, 노인에게는 인생이 된다.”니 얼마나 좋습니까! 시편이, 미사가 우리의 인생이 될 때 참 좋고 아름다운 삶에 죽음일 것입니다.

 

둘째, 회개입니다.

회개해야 부패하지 않습니다. 회개는 참 좋은 영적 효소입니다. 회개할 때 향기로운 발효인생이요 회개하지 않으면 부패인생에 구원도 없습니다. 회개한 성인은 있어도 부패한 성인은 없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부패하다 보면 변질되어 악마도 되고 괴물도 되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에 끊임없는 회개입니다. 오늘 수난복음은 인간 만물상 같습니다.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예수님 수난복음의 거울에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대부분 악하고 비열하고 배신하고 조롱하고 비아냥대는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던 이들을 악마로 돌변하여 십자가에 못박으라 광분, 광란합니다. 

 

예나 이제나 이런 악한 경향은 여전히 우리 안에 상존합니다. 마녀사냥이 공공연히 이뤄지는 때로 혹세무민惑世誣民의 가짜 뉴스, 더러운 영들이 범람하는 세상이 아닙니까? 코로나 바이러스가 상징하는 바 온갖 유해한 영적 바이러스들이요 하여 절박한 회개입니다. 주님을 배반한 유다와 베드로, 회개가 없었던 유다는 파멸로 인생을 마감했지만 그러나 베드로는 회개하여 거듭 납니다. 

 

많은 부정적 사람들뿐 아니라 참 좋은 사람들도 우리에게는 긍정적 회개의 표지가 됩니다.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 고백한 백인대장과 순박한 이들, 멀리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지켜보던 마리아 막달레나,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제베대오의 아들들의 어머니, 새삼 예나 이제나 참으로 강한 분들은 이런 신앙의 어머니들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이들이 성인입니다.

 

또 예수님의 시신을 깨끗한 아마포로 감싼 다음, 새 무덤에 안장한 요셉은 얼마나 아름답고 거룩한 성인의 모습인지요! 바로 이런 이들도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긍정적 표지들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정치란 심산유곡에 피어난 순결한 백합꽃이 아니라 흙탕물 속에 피어나는 연꽃’이라 했는 데, 바로 성인이 그러합니다.

 

셋째, 비움입니다.

기도와 회개에 이어 비움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믿는 이들의 삶은 비움의 여정입니다. 겸손의 사랑, 순종의 사랑 모두가 비움에 포함됩니다. 갈수록 모으는 삶이 아니라 버리는 삶, 쌓는 삶이 아니라 나누는 삶, 채우는 삶이 아니라 비우는 삶, 집착하여 머무는 삶이 아니라 떠나는 삶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따를 때 저절로 버리고 나누며 비우고 떠나게 됩니다. 

 

늘 읽어도 위로와 격려가 되고 참으로 감동적인 제2독서 필리비서의 그리스도 찬가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비움의 삶을 롤모델로 삼았던 사도 바오로이고 성인들이며 오늘의 우리들입니다. 온갖 수모, 모욕, 치욕, 상처 등 모두를 비움의 계기로 삼을 때 치유의 은총이요 더욱 파스카의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하여 우리는 평생 매주일 토요일 저녁 제1기도 때마다 이 필리비서 찬가를 노래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비움의 절정, 낮춤의 절정, 순종의 절정을 보여 주는 참 감동적인 그리스도 찬가입니다. 바로 이런 삶의 모습이 진짜 영성입니다. 마침내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하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그대로 비움의 삶을 사는 모든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축복의 복음, 그리스도의 찬가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기도하며, 회개하며, 비우며, 성인을 목표로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참 좋은 삶에 참 좋은 죽음의 선물로 보답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성지주일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기도와 회개, 그리고 비움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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