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빛처럼, 주님의 산처럼 -나의 빛, 나의 구원, 나의 생명이신 주님-2020.5.6.부활 제4주간 수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May 06,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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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5.6.부활 제4주간 수요일                                                        사도12,24-13,5ㄱ 요한12,44-50

 

 

 

주님의 빛처럼, 주님의 산처럼

-나의 빛, 나의 구원, 나의 생명이신 주님-

 

 

 

어제 미사중 코로나-19희생자들을 위한 기도로 시작한 교황님의 강론 서두 말씀이 마음에 깊이 와닿았습니다. 이들에 대해 진실로 아파하는 마음이 배어 있는 기도입니다.

 

“오늘 우리는 코로나-19로 죽은 세상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그들은 사랑하는 이들의 보살핌없이 ‘홀로alone’ 죽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장례식도 갖지 못했습니다. 주여, 당신 영광중에 그들을 맞아 주소서(May the Lord welcome them in His glory)”

 

참으로 안타깝고 불쌍한 죽음은 이런 죽음일 것이며, 세상에 이렇게 죽은 이들은 수없이 많을 것이고 저절로 기도하게 되며 우리의 죽음에 대해서도 기도하게 됩니다. 하여 분도 성인의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말씀은 여전히 호소력을 지닙니다. 죽음 대신 주님을 넣어, ‘주님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로 읽어도 실감있게 와닿습니다.

 

수도원 공동 휴게실에서 회의나 강의중 제가 선호하는 제자리가 있습니다. 저만이 아는 비밀입니다. 바로 눈들면 한눈에 들어오는 창밖 불암산 정상 봉우리입니다. 주님께 눈길 두는 마음으로 힘들고 눈길 둘 곳 마땅치 않을 때 하루에도 수없이 잠깐 잠깐 주님을 바라보듯 바라보는 불암산 정상 산봉우리입니다. 

 

제 침실 창밖 역시 눈들면 한눈에 들어오는 불암산 정상 산봉우리입니다. 애당초 창밖 불암산을 보고 택한 방입니다. 언제나 늘 거기 그 자리에서 꾿꾿이, 한결같이 제자리를 지키는 제 영원한 도반 불암산을 기리며 쓴 다음 시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언제나 그 자리에 불암산(佛巖山)이 되어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며 살았습니다.

있음 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행복한 산이 되어 살았습니다.

이젠 오랜 연륜과 더불어 내적으로는 장대(長大)한 

'하느님의 살아있는 산맥(山脈)'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분도수도회원들의 으뜸 서원이 정주서원입니다. 죽을 때까지 하느님 불러 주신 제자리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정주는 ‘장소의 사랑(amator loci)’과 직결됩니다. 참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사랑하듯 그런 상징적 장소는 너무 중요합니다. 어느 수도 고승의 인터뷰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그렇다. 정주는 장소에 대한 사랑이다. 나는 법적인 설명을 떠나 그것이 정주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 장소에 대한 사랑, 애정, 집착이다. 내 경우 나를 끌어들이는 들이는 것은 수도승들도, 삶의 방식도, 전통들도 아닌 그 장소였다.”

 

늘 거기 그 자리 정주의 장소가 상징하는 바 주님입니다. 제 경우 주님을 바라보듯 늘 거기 그 자리 불암산 정상의 산봉우리를 바라봅니다. 이런 바라봄 자체가 위로요 치유요 구원이 됩니다. 정주의 사랑을 노래한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사랑은/주님 안에서

제자리를 지켜내는/거리를 견뎌내는/어려움을 버텨내는

고독의 능력이다

지켜냄과 견뎌냄과 버텨냄의 고독중에

순화되는 사랑/깊어지는 사랑/하나되는 사랑이다”-1997.3

 

참으로 정주의 중심은 주님이십니다. 늘 주님을 바라볼 때 지켜내고 견뎌내고 버텨낼수 있는 힘도 선물로 주어집니다. 하여 여기서 저절로 떠오른 "주님의 빛처럼, 주님의 산처럼-나의 빛, 나의 구원, 나의 생명이신 주님-" 강론 제목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주님이 아니라 세상을,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주님이십니다. 구원은 이미 여기 빛이신 주님 안에 머뭄으로 시작됩니다. 심판은 주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빛이신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자초한 것입니다. 

 

참으로 정주의 ‘장소의 사랑’이 심오합니다. 보이는 장소를 통해서 예수님을, 궁극엔 하느님 아버지를 바라보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과 아버지는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버지를 믿는 것이요 예수님을 보는 것이 아버지를 보는 것입니다. 빛이신 예수님과의 일치가 바로 아버지와의 일치인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정주의 핵심은 언제 어디서든 삶의 중심인 주님의 빛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주님 빛 안에 머물 때 영원한 생명이요 궁극의 모든 것은 해결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선교활동의 결론 말씀이요 사도행전은 바오로의 본격적 전도여행의 시작을 앞두고 있습니다. 끝은 시작임을 말해 줍니다. 하여 끊임없이 복음 선포활동은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여기서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 새삼 스럽게 주목되는 바, 성령입니다. 주님은 성령입니다. 주님의 성령은 사랑이요 빛입니다. 주님의 성령 안에 정주하는 선교사 바르나바와 사울입니다. 안티오키아 교회의 예언자들과 교사들이 주님께 예배를 드리며 단식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는 이들에게 이르십니다.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

 

이어 성령께서 파견하신 바르나바와 사울은 유다인들의 여러 회당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주님의 성령 안에 정주하며 성령의 보호와 인도하에 자유로이 복음을 선포하는 두 사도입니다. 

 

결국은 언제 어디에 있든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 정주하는 우리임을 깨닫게 됩니다. 장소의 정주가 궁극으로 의도하는 바 역시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의 정주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각자 삶의 제자리 주님 안 정주처定住處에서 꾿꾿이, 항구히, 지켜내고 견뎌내고 버텨낼 신망애信望愛의 힘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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