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사랑하여라 -사랑 예찬禮讚-2020.5.15.금요일 성 파코미오 아빠스(287-347) 기념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May 15,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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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5.15.금요일 성 파코미오 아빠스(287-347) 기념일 

사도15,22-31 요한15,12-17

 

 

 

서로 사랑하여라

-사랑 예찬禮讚-

 

 

 

오늘은 성 파코미오 아빠스 기념일이자 조선 최고의 성군聖君이라 일컫는 세종대왕 탄신일이자 더불어 스승의 날이기도 합니다. 민족의 스승 세종대왕을 통해 스승의 진가를 새롭게 확인하는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백성을 사랑했던 애민愛民의 성군이었기에 훈민정음, 한글의 창제도 가능했음을 깨닫습니다. 또 오늘은 우리 요셉 수도원의 원장인 최파코미오 신부의 영명축일이라 경사가 겹친 느낌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행복하리란 예감이 듭니다. 오늘 복음도 어제와 중복됩니다.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롭게 깨닫습니다. 강론 제목도 세 번째 비로소 확정되었습니다. “사랑의 학교-평생 사랑의 학인-”으로 정했다가, “사랑의 여정, 사랑의 학교-허무와 무지에 대한 답은 사랑뿐이다-”로 했다가, 마침내 “서로 사랑하여라-사랑 예찬禮讚-”으로 정했습니다.

 

어제도 참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수도원을 방문하거나 면담고백성사를 본 분들에게 사랑의 표현으로 두편의 시를 출력해 선물하여 큰 소리로 읽게 했는데 너무 공감하며 기뻐했습니다. 최근 시중 저 역시 가장 아끼는 아주 짧은, 금방 외워지는 시詩라 다시 나눕니다.

 

-“사람은 꽃이다/늘 피는 꽃이다”-

 

-“꽃이 꽃을 가져 오다니요/그냥 오세요/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산이 산에 가다니요/그냥 있으세요/당신은 산보다 더 좋은 산이예요”-

 

참으로 사랑스런 꽃같은 사람이요, 아니 꽃보다 더 예쁜, 산보다 더 좋은 산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아름답고 품위있고 향기롭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또 어제 저녁 식사중 파코미오 원장 축일 축하식도 “서로 사랑하라”는 오늘 복음 말씀이 그대로 실현된 참 아름다운 분위기라 사진도 여러 장 찍었습니다.

 

사랑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행복하게 합니다. 말그대로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답이 없습니다. 사랑의 여정에, 사랑의 학교인 인생이라 평생 배워가야할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영원한 초보자인 우리들입니다.

 

사랑은 삶의 의미입니다. 사랑은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생 허무와 무지에 대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만병의 근원이 사랑결핍에 있고, 만병통치약은 사랑뿐입니다. 수십년간 강론중 가장 많이 나눴던 주제가 사랑입니다. 다음 행복기도 역시 ‘사랑의 눈’이 열렸을 때의 행복한 상태를 고백한 시입니다.

 

-“주님/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하늘 나라/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신록의 생명으로 빛나는 5월의 아름다운 산야山野는 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은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복음이 그토록 아름다운 것은 주님의 사랑이 그대로 표현됬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의 계명은 그대로 사랑의 명령이 됩니다. “되면 하라”가 아닌 “하면 되라”입니다. 사랑하면 사랑됩니다. 마냥 될 때까지 기다리면 언제 할지 모릅니다. 그러니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사랑을 실행하는, 사랑의 수행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사랑은 추상 명사가 아닌 실천 동사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말마디에서 평생 주님께 배워 실천해야 할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의 눈만 열려 실천하기로 하면 널려 있는 사랑입니다. 끊임없이 겸손히 자기를 비워내 나누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런 사랑이 자라나 목숨을 내놓은 순교의 사랑, 헌신의 사랑도 가능합니다. 

 

사랑을 실천할 때 주님의 친구요 우정도 날로 깊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친구”라니 얼마나 영예로운 호칭인지요. 참으로 주님의 친구답게 아름다운 사랑, 품위있는 사랑, 향기로운 사랑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자랑스럽고 고마운 것은 우리가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친구로 택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사랑의 열매입니다. 주님이 보시는 것도 사랑의 열매요 주님은 물론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도 이런 사랑의 열매입니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아버지께서도 다 들어 주십니다. 이런 사랑의 모범이 사도행전의 바르나바와 바오로입니다.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정말 예수님의 친구 두 사도입니다. 사랑은 또한 분별의 잣대가 됩니다. 참으로 현명한 판단은 성령의 은총, 사랑에서 나옵니다. 예루살렘 사도회의의 현명한 결정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가지 외에는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곧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들만 하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이처럼 짐을 최소화하여 가볍게 해주는 것이 바로 실천적 사랑입니다. 무엇보다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은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틀림없이 더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본질적인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예수 성심의 사랑이 궁극의 분별의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의 여정, 사랑의 학교입니다. 평생 졸업이 없는 사랑의 학교에서 평생 배워야 할 사랑이요, 평생 사랑의 여정에서 날로 평생 친구인 예수님과 우정의 사랑을 깊이해야할 우리들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삶의 의미요 보람입니다. 인생 허무와 무지에 대한 답도, 서로 사랑에 대한 답도, 이런 주님과 우정의 사랑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과 우정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5,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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