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의 삶 -늘 새롭고 아름답고 행복한 삶-2020.6.7.주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un 0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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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6.7.주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탈출34,4ㄱㄷ-6.8-9  2코린13,11-13 요한3,16-18

 

 

 

삼위일체의 삶

-늘 새롭고 아름답고 행복한 삶-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우리는 방금 십자 성호를 그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성호경으로 삼위일체 하느님을 고백하며 이 거룩한 미사를 시작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단순하고 쉽고 아름답고 깊은,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는 가톨릭 교회의 보물같은 기도가 성호경과 영광송입니다. 고개를 숙이며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으로 끝나는 영광송 기도는 또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지요. 세상에 이보다 좋은 기도는 없을 것입니다. 미사중 성호경과 더불어 인사는 바로 오늘 제2독서 코린토 2서 13장 13장 말씀에 근거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과 함께”

 

하루에도 얼마나 많이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고백하는 지요. 이처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삼위일체에 근거합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신비는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의 핵심적인 신비입니다. 이는 하느님 자신의 내적 신비이므로, 다른 모든 신앙의 신비의 원천이며, 다른 신비를 비추는 빛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바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참되고 유일한 하느님께서 당신을 알리시고, 죄에서 돌아서는 인간들과 화해하시고 그들을 당신과 일치시키려는 길과 방법의 역사이지 그 밖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가르침입니다. 오늘 우리 수도자들은 참 깊고 아름다운 초대송과 찬미가를 통해 장엄한 삼위일체 하느님을 고백했습니다.

 

-“삼위에 일체이시고 일체에 삼위이신 참된 하느님께 어서 와 조배드리세”-

 

-“영원한 천상낙원 천사성인들 성부와 말씀이신 독생성자와 

거룩한 숨결이신 성령삼위를 한분의 주님으로 고백하도다

 

성삼의 그 신비는 깊고도 깊어 누구도 알아들을 길이 없으나 

하늘의 시민들은 성삼뵈옵고 드높이 노래하며 기뻐하도다”-

 

얼마나 아름다운 찬미가인지요. 아니 이미 하늘의 시민들인 우리는 성삼을 뵈오며 기쁜 마음으로 이 거룩한 미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의 삶은 단순합니다. 성부 하느님을 온 맘으로 사랑하고 성자 예수님과 형제들과 함께, 성령안에서 성령에 따라 살아가는 삶이 바로 삼위일체의 삶입니다. 

 

삼위일체 사랑의 신비에 깊이 참여할수록 온전한 참 나의 실현이요 늘 새롭고 아름답고 행복한 삶입니다. 어제 교황님의 말씀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네가 최고의 직업인이 될 수 있고 강철같은 건강을 지닐 수 있다. 그러나 네가 존엄한 품위dignity를 지니지 못하면 너는 무가치하다. 존엄한 품위는 행복한 삶의 조건이다. 부자든 빈자든, 병자든 건강한 자든, 존엄한 품위는 하느님과 타인들 앞에서 생명의 길이다. 존엄한 품위는 하느님의 자녀됨에서 오는 내적 힘을 주며, 네가 하느님이 아니라는 자각과 더불어 겸손을 준다.”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는 이런 존엄한 품위는 삼위일체의 삶에 깊이 참여할 때의 은총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공동체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두 측면에 걸쳐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사랑은 개방입니다.

겸손한 사랑의 개방입니다.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신 성부 하느님은 성자 예수님과 성령으로 활짝 자기를 개방하셨습니다. 하여 이제 모두가 하느님 가까이 하느님과 함께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유다교와 이슬람의 유일신 하느님과 비교하면 삼위일체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담박 드러납니다. 하느님은 어디에서나 누구에게 활짝 열려 있는 문처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로 자신을 완전히 개방하셨습니다. 바로 오늘 요한복음이 그 진리를 잘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성자 예수님을 통해 자신을 완전히 개방하신 사랑의 성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참 좋은 무상의 선물, 예수님을 믿을 때 영원한 생명의 구원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이 너무나 사랑한 세상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새삼 심판이나 멸망은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벌이 아니라, 스스로 믿지 않아 자초한 화임을 깨닫게 됩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참 단호합니다. 영원한 생명의 구원은 바로 믿음의 선택과 결단에 달려 있음을 봅니다. 하느님 외아드님 성자 예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오늘 지금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구원과 심판임을 깨닫습니다. 늘 깨어 살펴봐야 할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보통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이 너무나 사랑한 세상입니다. 부정적 비관적 세계관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깨닫습니다. 정말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긍정적 낙관적 세계관을, 인생관을 지닐 것이며 하느님께서 사랑하신 세상을 사랑할 것입니다. 집착이나 탐욕이 없는 순수한 사랑으로 하나뿐인 공동의 집인 아름다운 지구를 잘 돌 볼 것입니다. 지난 6월5일 세계 환경의 날, 교황님은 담화문에서 우리는 병든 세상에서 건강한체 할 수는 없다며 후대에게 더 좋고 건강한 지구를 남겨 줄 수 있도록 생태적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요즘 참 아름다운 6월 예수성심성월의 자연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사랑은 그대로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둘째, 사랑은 관계입니다.

혼자 사랑은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성부 하느님은 혼자가 아닙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공동체 관계의 하느님입니다. 고립단절이 지옥입니다. 혼자 살면 절대로 삼위일체 하느님을 깨달을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으며 구원도 없습니다. 있다면 필시 환상이요 착각일 것입니다. 공동체와 더불어의 구원입니다. 

 

사랑할 때 닮습니다. 삼위일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랑의 관계는 얼마나 깊고 아름답겠는지요. 매일미사책에 나오는 오늘 묵상을 소개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닮은 정도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를 이루시지 않겠습니까? 삼위일체 하느님은 영원무궁토록 무한한 사랑을 하고 계시니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세 위격은 서로의 존재를 침해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본디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는 상대방을 자기 방식대로 끌어 들이지 않고, 상대방의 존재 방식을 있는 그대로 잘 간직하도록 애써 줍니다. 하여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서로 일치하시는 가운데서도 성부의 위격이 다르고, 성자의 위격이 다르고, 성령의 위격이 다릅니다.”

 

하나이면서 동시에 셋이니 얼마나 깊고도 참된 삼위일체 사랑의 관계인지요. 참으로 삼위일체 하느님은 공동체 사랑의 관계의 모범입니다. 참 좋은 공동체를 통해 계시되는 삼위일체 하느님입니다. 

 

참된 사랑은 각자 고유의 참나의 실현에 이르게 합니다.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이것이 참 사랑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에 깊이 참여할수록 공동체의 일치도 날로 깊어질 것입니다. 획일화의 일치가 아니라 다양성의 일치입니다. 문득 아주 오래전 무려 23년전에 써놨던 시가 생각납니다. 참 사랑에는 고독과 거리가 필수임을 알려 줍니다.

 

-“사랑은 하느님 안에서 

제자리를 지켜내는 거리를 견뎌내는 고독의 능력이다.

지켜냄과 견뎌냄의 고독중에

순화되는 사랑, 깊어지는 사람, 하나되는 사랑이다”-1997.3

 

일치의 관계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분이 바로 사랑의 성령입니다. 말 그대로 성령의 친교입니다. 그러니 공동체의 일치에 청할 것은 성령뿐임을 깨닫습니다. 정말 공동체든 개인이든 고질적 병이자 죄가 분열입니다. 바로 분열을 치유하는 것이 성령의 친교입니다. 바로 우리는 전 주일 성령 감림 대축일 때 성령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성령 칠은과 성령의 아홉 열매는 얼마나 풍성하던지요. 

 

성령 칠은은 지혜, 통찰, 식견, 용기, 지식, 공경, 경외이고, 성령의 아홉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 모든 성령의 선물들은 삼위일체 신비의 삶에 깊이 참여할수록 주어지는 선물들입니다. 새삼 십자 성호을 그으며 바치는 삼위일체 고백의 기도가 얼마나 고마운지 깨닫습니다. 바로 우리 전 존재에 주님의 십자가를 각인하며 삼위일체 하느님을 마음 깊이 모시기 때문입니다. 어제 읽은 참 깊은 시를 나누고 싶습니다. 박노해 시인의 “남이 될 수 있는가”라는 시입니다.

 

-“진정 나는 나일 수 있는가

나 자신이 되는 일을 하고
내 가슴이 두근대는 사랑을 하고
아무도 없는 듯 노래하고 춤추고
내 영혼의 길을 따라 갈 수 있는가

진정 나는 남이 될 수 있는가
될 수 있으면 많은 남들이 될 수 있는가
남이 되는 일을 하고
남이 되는 밥을 먹고
남이 되는 공부를 할 수 있는가

남이 될 수 있는 능력만큼이 나인 것을
많은 남들이 될 수 있는 능력이 진정한 나인 것을
진실로 남이 될 수 있는 능력이
내가 가진 가장 큰 힘인 것을”-

 

참으로 자신을 부끄럽게 하는 시입니다. ‘남이 되는 것’을 할 때 진정 나일 수 있음을 깨닫게 되니 바로 이것이 자기를 내어 주는 ‘자기증여self-giving’의 사랑입니다. 혼자서는 결코 자기실현에 이를 수없습니다. 끊임없는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자기증여, 자기비움의 역설적 사랑만이 자기실현에 이르게 합니다. 얼마나 많이 ‘자기섬김self-serving’의 이기적 사랑안에 머물고 있는지요.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삼위일체의 복된 삶에 항구하고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영광송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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