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결같은 주님의 전사戰士 -두려워하지 마라, 함께하라, 선포하라-2020.6.21.연중 제12주일 예레20,10-13 로마5,12-15 마태10,26-33

by 프란치스코 posted Jun 2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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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6.21.연중 제12주일                                            예레20,10-13 로마5,12-15 마태10,26-33

 

 

 

한결같은 주님의 전사戰士

-두려워하지 마라, 함께하라, 선포하라-

 

 

 

“주여, 당신의 넓으신 자비로 나를 도우소서”

 

방금 부른 주님의 자비를 청하는 화답송 후렴이 마음에 긴 여운을 남깁니다. 참으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도움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벗어날 때 일어나는 온갖 불행입니다.

 

교황님 홈페이지를 여는 순간 환한 두 얼굴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늘 미소짓는 교황님 얼굴에 후덕해 보이는 중년 후반부의 여성이 함께 찍은 참 행복해 보이는 아름다운 사진이었습니다. 바로 미국의 그 유명한 인권 운동가였다 살해된 마르틴 루터 킹의 따님이었습니다. 머릿 기사의 제목은 그녀의 고백이었습니다.  

 

“교황님과 내 아버지는 똑같은 꿈에서 일치되어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마르틴 루터 킹, 참으로 위대한 신앙인들이자 성인들입니다. 늘 하느님을 꿈꿨던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참으로 행복했던 분들이며 이런 성인같은 분들을 통해 하느님의 꿈은 서서히 실현되어 갑니다. 참으로 어렵고 힘든 세상일수록 하느님 중심의 삶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참행복은 하느님 중심의 삶에 있습니다. 모든 불행과 혼란은 하느님 중심을 잃음에서 기인합니다. 하느님이야 말로 우리의 미래이자 희망이요 참행복의 원천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과의 일치가 깊어질수록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참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가 54장, ‘주님은 나의 목자’는 언제 불러도 감미롭고 위로와 힘을 줍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나는 아무것도 아쉽지 않네

푸른 풀밭 시냇가에 쉬게 하사/나의 심신을 새롭게 하네.”

 

하느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어 우리 삶의 중심이 될 때 비로소 안정과 평화입니다. 언젠가 어느 분의 묘비명 부탁에 지체없이 추천했던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라는 성구도 생각납니다. “잘 놀다 간다”라는 묘비명과도 잘 어울립니다.

 

그러니 한결같은 주님의 전사로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십시오.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한결같은 주님의 전사로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첫째, “두려워하지 마라”

주님 말씀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하느님 중심의 삶을 새로이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깊은 안정과 평화가 뒤따릅니다. 오늘 복음은 온통 세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마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두려움과 불안은 우리의 원초적 정서입니다. 요즘 같은 불확실한 삶은 더욱 우리를 두렵고 불안하게 합니다. 흡사 두려움에 포위되어 불안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같습니다. 평화가 없습니다. 

 

바로 믿음 부족에서 오는 두려움과 불안입니다. 믿음의 빛이 두려움과 불안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하여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박해 상황중에 있는 제자들에 대한 주님의 격려 말씀입니다만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지 마련이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정말 두려워해야 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함이 지혜의 시작이요 믿음의 기초입니다. 공포의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의 두려움, 즉 하느님을 경외敬畏하는 경건敬虔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경외할 때, 올바로 두려워할 때 세상 두려움에서 해방됩니다. 하느님 두려운줄 모르는 믿음 부재의 사람들이기에 생각없이 함부로 본능의 욕망대로 막 살기에 불행한 삶입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참으로 하나하나 귀하게 살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의 사람들은 세상 그 누구도,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처럼 모든 사람 하나하나를 귀히 여깁니다. 참으로 주님께 청할 것은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도와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고통과 믿음은 함께 갑니다. 고통의 깊이는 믿음의 깊이입니다. 두려움의 고통을 없애 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맞이하는 고통을 견뎌낼 수 있는, 버텨낼 수 있는 깊은 믿음을 달라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의 넓이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삶의 깊이를 보십니다. 

 

삶의 깊이에서 만나는 주님이십니다. 두려움의 고통의 깊이 없이는 믿음의 깊이도 없습니다. 그러니 삶에서 오는 두려움과 고통을 믿음을 깊이하는 계기로 삼으십시오. 하여 더욱 견고해 지는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둘째,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주님 말씀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주님의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 뒤에는 반드시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말씀이 뒤따릅니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보다 더 나 가까이 있는 주님이십니다.  바로 이보다 더 큰 위로와 치유가 되는 말씀은 없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이보다 더 좋은 말씀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실 때 저절로 힐링이요 안정과 평화의 행복한 삶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수도원 십자로 중앙 예수님 부활상 아래 돌판에 세겨진 주님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주님께서 승천시 제자들은 물론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준다. 내가 도와 준다. 정의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준다.”(이사41,10).

제 여섯째 숙부가 임종전 일주간 붙잡고 사신 말씀이요, 제가 고백성사때 보속 처방전 말씀으로 자주 써드리는 성구입니다.

 

제1독서 예레미야의 두려움과 고통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사면초가 상황중에 들려오는 “저기 마고로 비싸빔이 지나간다!”며 수군대는 말소리입니다. 마고로 비싸빔은 “사방에서 공포가!”라는 뜻이요 적대자들이 예레미야에게 붙여준 별명입니다. 흡사 수난중인 예수님을 연상케 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고통이 클수록 깊어지는 하느님 믿음의 크기와 깊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 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이렇게 적대자들에 대해서는 온통 우리 곁에 계신 하느님 처분에 맡겨드리는 것이 믿음이요 지혜입니다. 이런 고통의 심연에서도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니 터져 나오는 하느님 찬미입니다. 순경順境중에 찬미는 누구나 합니다. 이런 역경逆境중에도 불구하고 터져나오는 하느님 찬미가 그 진정성을 보장합니다. 

 

역경을 순경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어둠을 빛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하느님 찬양입니다. 참으로 불운을 행운으로, 운명을 바꾸는 하느님 찬양입니다. 예레미야의 찬양이 심금을 울리는 감동입니다.

 

“주님께 노래 불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일희일비함이 없이 한결같이 바치는 하느님 찬미와 찬양이 하느님 중심의 믿음을 견고히 하며 두려움과 불안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더불어 영원한 동반자이자 도반이신 주님과 우정의 사랑과 신뢰도 날로 깊어지고 튼튼해 집니다.

 

셋째, “복음을 선포하라”

주님 말씀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주님과의 관상은 복음 선포의 활동으로, 주님과의 친교는 선교활동으로 향할 때 더욱 견고해지는 주님과의 일치입니다. 끊임없이 바다를 향해 흐를 때 살아 있는 맑은 강이듯 끊임없이 복음 선포의 활동이 있을 때 더욱 깊어지는 관상의 친교요 더욱 견고해지는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는 우리의 존재이유입니다. 우리 삶자체가 복음이, 복음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 선포와 더불어 사라지는 무지의 두려움, 무지의 어둠입니다. 

 

바로 하느님이, 하느님의 나라가, 파스카의 예수님이 복음입니다. 우리 삶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가, 예수님이 투명히 드러날수록 저절로 복음 선포입니다. 그러니 복음 선포의 삶은 그대로 말과 글과 행동으로, 아니 우리 삶 전부로 주님을 증언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참 엄중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의 선물은 우리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5,15). 그러니 주 예수님과 우정의 관계는 얼마나 중요한지요. 사랑과 앎은 함께 갑니다. 사랑할 때 알고 알 때 증언합니다. 과연 나는 주님을 얼마나 알고 있으며 주님은 나를 얼마나 알고 있겠는지요. 우리보다 우리를 잘 아시는 영원한 도반 주님이십니다. 주님과 사랑과 앎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 사랑과 앎의 관계인지 깊이 성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삶은 영적전쟁입니다. 예레미야도 예수님도, 당대의 제자들도 모두 훌륭한 하느님의 전사들이었고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이요 영원한 현역의 죽어야 제대인 우리들입니다. 강론을 써가면서 새롭게 바뀐 강론 제목입니다. 

 

주님의 전사는 한결같아야 합니다. 젊었을 때는 모르지만 세월 흘러 나이들어갈수록 한결같은 삶이 얼마나 힘든지 깨닫습니다. 절대 저절로 한결같은 삶이 아니라 갈수록 치열한 분투奮鬪의 노력이 있어야 비로소 한결같은 주님의 전사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 중심의 확고한 믿음의 삶과 더불어 한결같은 주님의 전사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시며 당부 말씀을 주십니다.

 

1.두려워하지 마라.

2.나와 함께 있어라.

3.복음을 선포하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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