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길 -기도, 회개, 용서-2020.6.25.목요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by 프란치스코 posted Jun 25,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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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6.25.목요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신명30,1-5 에페4,29-5,2 마태18,19ㄴ-22

 

 

 

평화의 길

-기도, 회개, 용서-

 

 

 

오늘은 6.25 한국전쟁 70년이 되는 날이자 한국 가톨릭 교회가 정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이기도 합니다. 70년이 지났지만 6.25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며 신문들도 다양한 특집 기사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강조하는 것이 이념이나 민족도, 통일도 아닌 평화입니다. 어느 저명한 학자(박명림)의 견해에 공감했습니다.

 

“분단의 반대는 통일이 아니라 평화다. 적대의 반대도 통일이 아니고 평화공존이다. 통일 대신 평화가 목적이 됐을 때 끝내 통일 폭력을 넘어 평화공존을 구가할 수 있다. 남한과 북한의 평화공존은 통일의 유예다. 결코 통일의 포기는 아니다. 오히려 장기 평화야말로 교류와 접근을 통해 통일의 가능성을 높인다.”

 

좋은 전쟁보다는 나쁜 평화가 백배 낫습니다. 인간 무지無知의 결정체가 전쟁입니다. 6.25 사변은 물론 6.25 전후의 폭력의 참상을 결코 반복해선 안될 것입니다. 그동안 한반도에 흘린 피로 충분합니다. 그동안 억울하고 무고하게 죽어간 원혼冤魂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더 이상 악순환의 전쟁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하여 평화입니다. 평화공존이 답입니다. 우선 서로 존중하고 도우며 평화롭게 사는 것입니다. 나라나 공동체의 원리나 똑같습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하는 기도 역시 평화공존을 위한 기도입니다. 멀리서 부터가 아닌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 삶의 자리에서부터 평화공존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서도 교회도 참 많이 강조하는 평화입니다. 미사경문 역시 얼마나 많이 평화를 강조하는 지요.

 

“주님의 평화가 항상 여러분과 함께”

 

미사중 영성체후 나누는 평화예식중 사제의 권고에 모두 서로 “평화를 빕니다.” 인사를 나누는 모습은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요. 참 소중한 평화입니다. 모든 것을 다 지녔어도 내 마음에, 내 공동체에 평화가 없다면 결코 행복하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5,9)

 

주님이 우리에게 참으로 바라시는 것도 평화의 사람, 평화의 전사입니다. 이런 이가 진정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평화는 주님의 선물입니다. 참으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날 때 주어지는 평화의 선물입니다. 주님의 평화에 참여할 때 비로소 참 평화입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이런 참 평화를 누릴 수 있을까요.

 

첫째, 기도입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항구하고 간절한 기도입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바쳐야 하는 기도입니다. 평화의 전사는 기도의 전사입니다. 기도와 더불어 인내의 사랑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의 근원적 폭력성, 잔인성, 공격성부터 정화해야 합니다. 각자는 세상의 축소판입니다. 세상의 평화에 앞서 내 자신의 내적 평화입니다. 하여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개인기도와 더불어 공동기도입니다. 

 

우리 수도공동체가 평화공존의 일치를 이루며 사는 것도 끊임없이 공동전례기도를 바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가정공동체의 평화를 위해서도 함께 기도는 필수입니다. 참으로 남북의 평화공존을 위해서 교회의 기도가 그리도 절실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기도할 때 주님을 중심으로 한 평화의 일치입니다. 참으로 청할 것은 평화뿐임을 깨닫습니다. 미사중 축성된 빵을 쪼개는 동안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기도가 새삼스럽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평화를 주소서” 에 이어 “평화가 되게 하소서” 기도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둘째, 회개입니다.

회개의 사람이 평화의 전사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에 이어 끊임없는 회개입니다. 믿는 이들의 삶의 여정은 기도의 여정이자 회개의 여정이라 할만 합니다. 기도와 회개없이 무지와 허무의 광야인생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런지요. 기도에 따른 회개입니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회개요, 참으로 인간의 위대성도 회개에 있습니다. 

 

하느님 안 내 본연의 자리로 돌아옴이 회개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참 나의 발견이 회개요 회개의 열매가 겸손과 진실입니다. 오늘 제1독서 신명기에서 모세를 통한 주님의 말씀은 그대로 우리를 향합니다.

 

“내가 너희 앞에 내놓은 축복과 저주가 너희 위에 내릴 때, 너희가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대로 너희의 아들들이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

 

운명을 바꿔주는 회개의 은총입니다. 무엇보다 회개의 열매는 말로서 드러나야 합니다. 제2독서 에페소서에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우리의 회개의 진정성을 가늠하는 잣대가 됩니다.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됩니다. 필요한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 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남말만 하지 않아도,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회개의 표지이자 성인입니다. 참으로 회개의 사람은 경박輕薄, 천박淺薄한 직선적直線的인 말로 상대방을 아프게 하지 않고 곡선曲線의 둥근 마음, 둥근 말로서 위로와 격려, 치유를 선물합니다. 덕담德談, 청담淸談, 유머의 빛나는 말로 분위기를 밝고 맑게 합니다. 

 

예전 풍류風流를 알아 시문詩文으로 주고 받던 선비들의 깊고 아름다운 대화가 그리워지는 시절입니다. 시詩같은 삶에 시詩같은 말마디를 주고 받는 사이라면 얼마나 아름다운 우정의 관계겠는지요.

 

셋째, 용서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에, 끊임없는 회개에 이어 끊임없는 용서입니다. 용서의 사람이 평화의 전사입니다. 죽을 때까지 숨쉬듯이, 밥먹듯이 끊임없이 용서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는 물론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끊임없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용서할 때 용서받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도 먼저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해야 주님의 은총으로 내가 자유로워지고 상처도 치유됩니다. 용서의 신적 사랑이 주님을 닮게 합니다. 참으로 고귀한 용서의 사랑입니다. 최후의 승자는 용서의 사람이며 참으로 주님을 닮은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용서를 권하는 말씀이 참 아름답습니다.

 

“서로 너그럽게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참으로 용서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이 되어 사랑 안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향기로운 용서의 삶인지요. 

 

평화는 멀리부터가 아닌 가까이 내 삶의 자리로부터 시작됩니다. 평화의 길에 기도와 회개, 용서는 필수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녀답게 평화의 전사로 살게 하십니다. 끝으로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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