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삶 -희망하라, 항구하라, 겸손하라-2020.7.12.연중 제15주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ul 1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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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7.12.연중 제15주일                                                  이사55,10-11 로마8,18-23 마태13,1-23

 

 

 

구원의 삶

-희망하라, 항구하라, 겸손하라-

 

 

 

참 열심한 분들을 만나면 기분이 좋고 힘이 납니다. 새로운 힘을 얻는 기분입니다. 어제의 예수성심형제회 모임이 그렇습니다. 그러고보니 어제 2020.7.11.일 성 베네딕도 아빠스 대축일은 참 각별한 날이었습니다. 제가 요셉 수도원에 부임한지 만32주년(1988.7.11.)이 되는 날이자 사제서품 만31주년(1989.7.11)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또 대축일 미사때는 정아브라함 수사의 유기서원 갱신 예식이 있었습니다. 어제 모임을 가진 7명의 형제자매들도 참 성실한 분들이었습니다.

 

“꼭 예수님 제자들이 앉아 있는 모습같습니다.”

 

미사는 물로 강의에 앞서 배치된 책상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마스크를 쓴 모습을 보고 나눈 덕담입니다. 시종일관 진지한 참여 자세는 얼마나 든든했는지요. 책임을 맡은 형제의 아침 카톡 메시지도 잊지 못합니다.

 

“신부님, 베네딕도 성인 축일 축하드립니다. 어제 저녁에 본당 주임신부께서 연령회장하라고 임명하셨습니다. 아침에 매일미사 읽다가 베네딕도 성인 축일 전야에 임명받았으니 큰 축복을 주셨나보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대로 믿음의 표현입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느님 섭리 안에서 이뤄지는 일입니다. 주변에서 뜻밖의 변고나 죽음을 대하며 깨닫는 바이기도 합니다. 한 치도 내다 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기도하며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루하루 깨어 최선을 다해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십자가의 길’ 기도후 알뜰히 모임을 끝내고 떠날 때는 함께 수도원 정원에서 사진도 찍었는데 참 아름답게 빛나는 모습들에 덕담 메시지와 더불어 사진도 전송했습니다.

 

“모두의 얼굴이 예수성심의 성덕으로 아름답게 빛납니다! 주님 안에서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이런 믿는 형제들의 모임은 말그대로 광야 세상에 구원의 오아시스입니다. 참으로 요즘 저절로 자주 바치는 행복기도문중 일부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늘 읽어도 새롭고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됩니다. 하루하루가 하느님의 선물이요 구원의 하루입니다. 구원도, 행복도 오늘 지금 여기서 시작됩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갈 때 깊고 아름다운 한 폭의 인생 그림이 완성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구원의 삶일까요?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알려 드립니다.

 

첫째, “희망하라”입니다.

희망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희망을, 꿈을, 비전을 잃을 때 인간성도 황폐화되기 시작합니다. 인간의 품위 유지에도 결정적인 희망입니다. 참으로 영혼의 건강에 필수인 희망입니다. 광야인생에 피어난 희망의 꽃이요, 광야의 어둠을 밝히는 희망의 빛입니다. 희망이 있기에 항구한 인내의 믿음이, 사랑이 가능합니다. 

 

궁극의 희망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이 궁극의 희망입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둔 자는 결코 무너지지도 타락하지도 않습니다. 자포자기의 절망의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정말 절망이 대죄입니다. 미래의 희망이 없다는 자에게 저는 “하느님이 미래요 희망이다!”라고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바로 이런 희망을 고백합니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길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뿐 아니라 피조물들도 구원의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있다는 놀라운 고백입니다. 바로 이런 희망이 있어 구원을 앞당겨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보세요. 

 

바로 예수님의 모습을, 참으로 믿는 이들의 항구한 모습을 상징합니다. 절망하지도 좌절하지도 않고 항구히 씨뿌리는 삶에 항구할 수 있는 비밀은 바로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었기에 가능합니다. 하느님은 물론 참으로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의 사전에 없는 단어가 절망입니다. 그러니 절망의 자살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정말 주님께 희망을 두고 잘 살다 잘 죽을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항구하라”입니다.

제 삶의 자리에 한결같은 항구함이 구원입니다. 우리 분도 수도자의 정주도 항구한 인내를 뜻합니다. 제가 하루에도 수없이 바라보는 평생 가장 많이 바라본 , 또 시에 가장 많이 등장한 대상이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입니다. 항구한 인내의 정주의 모범이 불암산입니다.

 

결코 배경의 하늘 환경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한결같은 불암산입니다. 하늘 배경이 흐리던 맑던, 어둡던 밝던 언제나 한결같이 크고 깊고 고요한 불암산입니다. 참으로 항구한 사람들은 경거망동하거나 부화뇌동하지 않습니다. 바로 씨뿌리는 사람으로 상징되는 예수님이 그러했고 그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한결같이, 기쁘게, 자발적으로 순교적 삶에 항구했고 충실했습니다.

 

길가에 떨어졌다하여 돌밭에 떨어졌다하여 가시덤불에 떨어 졌다하여 좌절하지 않고, 어떤 환경이든 환경에 일희일비 좌우되지 않고 항구히 기다리고 인내하며 끝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씨뿌리는 삶에 항구했습니다. 희망과 함께 가는 항구함임을 깨닫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삶은 과정입니다. 길고 넓고 깊게 삶을 조망하다 보면 객관적 시야도, 하느님의 시야도 지니는 법입니다. 

 

어찌 보면 삶은 리듬입니다.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 희망과 절망, 관상과 활동, 쉼과 휴식이 리듬처럼 펼쳐집니다. 바로 이것이 파스카의 삶입니다. 그러니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삶의 여정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좁게 보면 실패인생 같아도 지금 어디선가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들은 잘 자라 열매를 맺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마태13,8)

 

저 역시 사제서품후 만 31년 동안,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고 씨뿌리는 마음으로 과정에 충실하여 항구히 날마다 하루하루 강론을 써서 나누었고 매일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간절한 단 하나의 소원은 죽는 그날까지 날마다 잘 쓰든 못 쓰든 강론을 쓰고 미사를 봉헌하며 씨뿌리는 삶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희망을 둘 때 항구한 인내의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겸손하라”입니다.

오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전반부의 중심은 씨뿌리는 사람에 있다면 후반부 초대교회의 비유의 해설은 씨가 뿌려지는 땅이 중심입니다. 말씀의 씨가 아무리 좋아도 밭이 문제입니다. 하느님 탓이 아니라 내 탓입니다. 내 마음밭 관리에 소홀하고 태만했기 때문입니다. 추호도 하느님 말씀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줍니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55,10-11)

 

이렇듯 좋은 말씀입니다. 아무리 좋은 신고배도 끊임없이 잘 가꾸고 돌보지 않으면 돌배가 됩니다. 물도 주어야 하고 거름도 주어야 하고 농약도 주어야 좋은 땅에 좋은 나무입니다. 그냥 방치하면 신고 배나무는 돌배나무가 되고 땅은 잡초雜草 우거진 박토가 되고, 잡목雜木 우거진 야산이 됩니다. 

 

이래서 한결같은 수행의 노력입니다. 수행에 게을러지면 온갖 잡초들 우거진 밭처럼 우리 마음도 그렇게 됩니다. 길바닥이 돌밭도 가시덤불밭도 될 수 있고 하느님 말씀의 씨앗은 자라지 못합니다. 영적성장도 성숙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래서 마음의 귀를 활짝 열어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실천하는 것입니다. 바로 말씀의 ‘경청(傾聽, 敬聽)’과 실천입니다. 이점에서 저는 늘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여전히 부족한 경청이요 실행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래야 겸손한 마음의 좋은 땅입니다.

 

인간homo과 겸손humilitas의 어원은 흙humus에서 기인합니다. 흙같이 겸손해야 비로소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겸손의 수행으로 좋은 땅의 마음밭을 만드는 것이 모든 수행이 목표하는 바입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입니다. 참으로 겸손의 수행에 항구할 때 하느님의 은총으로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같은 마음밭도 좋은 땅의 마음밭으로 변모합니다. 

 

사실 변모는 우리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냥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겸손한 자세로 과정에 항구할 때 주님은 분명 풍성한 결실을 주실 것입니다. 바로 다음 복음의 결론이 주님 말씀의 경청과 겸손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게 합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지금도 정치인들 사이에 자주 회자되는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라는 말마디입니다. 농부는 한 겨울에도 봄을 준비하고 봄날에 씨뿌리는 것을 잊지 않고 한 여름 폭염속에도 가을걷이를 준비합니다. 날씨도 탓하지 않으며 하루하루 오늘에 충실하며 내일을 준비합니다. 

 

탓할 것은 하느님도 환경도 아닌 내탓입니다. 참으로 씨뿌리는 삶에 항구한 이들은 절망, 실망, 원망의 삼망이 없고 늘 감사, 감동, 감탄의 삼감의 삶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구원의 삶은 단순명쾌합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하루하루 한결같은 노력으로 겸손히 씨뿌리는 삶에 항구하고 충실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매일 우리 마음밭에 뿌려 주시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13,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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