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와 구원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이다-2020.7.31.금요일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1491-1556) 기념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ul 3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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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7.31.금요일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1491-1556) 기념일 

예레26,1-9 마태13,54-58

 

 

 

회개와 구원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이다-

 

 

 

오늘은 7월31일, 7월의 마지막 날이고 예수회의 창립자이자 초대 총장인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입니다. 참고로 예수회의 표어는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Ad majorem Dei gloriam)'이며, 예수회의 영성을 대표하는 표현으로는 '활동 중의 관상(Contemplation in Action)',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발견하기(Finding God in All Things)' 등이 있습니다.

 

내일부터는 8월의 시작 첫날입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하느님은 영원하십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둘 때 늘 새로운 시작의 삶입니다. 늘 새로운 시작의 삶을 살게 하는 회개입니다. 참으로 회개가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수행인지 늘 실감합니다. 믿는 이들의 삶만 봐도 회개의 메타노니아에 이은 친교의 코이노니아, 봉사의 디아코니아를 통해 회개가 믿음 생활의 기초임을 깨닫습니다. 성인들의 삶을 봐도 회심 체험이 얼마나 결정적 계기가 되었는지 알게 됩니다.

 

하느님은 선물처럼 교회가 필요로 할 때 마다 선물처럼 성인을 보내 주십니다. 대략 5세기 간격으로, 6세기의 어려운 시기에는 정주의 산山같은 성 베네딕도를 보내 주셨고, 12세기 혼란중에는 흐르는 강江같은 성 프란치스코를, 16세기에는 도시都市 한 복판에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를 보내 주셨으며, 21세기에는 사막의 성자 샤를로 후고를 보내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이어 시대의 예언자와도 같은 예수회 출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교회에 선물하셨습니다.

 

특히 오늘 축일을 지내는 이냐시오 데 로욜라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물론 전격적 회심체험도 참 전설적입니다. 군인으로 전쟁중 부상으로 인한 전격적 회심체험에 이어 33세 만학도가 되어 신학을 공부했고 마흔 여섯에 사제가 되었습니다. 생몰연대를 보니 만65세, 참 치열한 삶을 사셨습니다. 성인 축일 때 마다 늘 계산해 보는 바, 제 나이와의 비교입니다. 

 

교회에 보내 주신 성인들은 회개의 표징이자 희망의 표징입니다. 부단히 우리를 회개를 통한 구원의 삶에로 이끌며 늘 새로운 시작, 파스카의 삶을 살도록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참으로 절실한 생활 양식의 전환을 요구하는 내적혁명의 회개입니다. 특히 기후변화로 인해 하나뿐인 공동의 집 지구가 위기를 맞고 있는 작금의 시대에 강조되는 '생태적 회개'입니다. 어느 지구과학자의 호소입니다.

 

“오늘날 지구가 파괴되는 것은 욕망의 과잉 때문이다. 우리는 생명 파괴의 ‘거대한 가속’에서 생명이 지속할 수 있는 ‘담대한 전환(Great Transformation)’을 해야 한다. 미래란 그냥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담대하게 선택해야 할 때 올 것이다.”

 

아주 예전 써놨던 내적혁명이라 글이 생각납니다. 비온 뒤 얼마 안 지난 다음이라 요즘은 시냇물이 흐릅니다.

 

-“이런 게 혁명이라면 가끔은 있었으면 좋겠다

바짝 마른 바닥에 잡초와 오물들 

대책없이 썩어 악취를 발하던 시내가

폭우내리니 말끔히 씻겨 정리되고 

하얀 모래에 맑게 흐르는 물

살아 노래하는 시내가 되었다

이런게 혁명이라면 가끔은 있었으면 좋겠다”-2001.7.19

 

내적혁명의 회개를 통해 내면은 하느님 바다 향해 맑게 흐르는 강물처럼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도 뚜렷이 부각되는 바, 회개입니다. 회개를 통한 겸손과 구원이요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도 회개, 끊임없는 회개뿐입니다. 하여 우리 삶의 여정을 회개의 여정이라 정의하기도 합니다.

 

강론때 참 많이도 강조했던 무지입니다. 무지의 병, 무지의 악, 무지의 죄입니다.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말씀의 빛, 주님의 빛입니다. 회개의 빛이 무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와 예수님의 처지가 흡사합니다. 무지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참 고독한 모습입니다.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고 내가 너희 앞에 세워 둔 내 법대로 걷지 않는다면, 내가 잇달아 보낸 나의 종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 다면, 나는 이 집을 실로처럼 만들어 버리고, 이 도성을 세상의 모든 민족들에게 저주의 대상이 되게 하겠다.”

 

회개를 촉구하는 예레미야를 배격하는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사제들과 예언자들과 온 백성의 무지한 무리들이 배격했다 하니 흡사 무지의 악에 휩싸인 고립무원 처지의 예레미야 예언자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처지도 대동소이합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고향 사람들은 선입견, 편견, 질투의 무지에 눈이 멀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무지의 벽앞에 잠시 좌절하신 예수님의 심정을 헤아리게 됩니다. 주님의 일방적 기적은 없습니다. 무지로 마음을 닫고 있으면, 믿음으로 마음을 열지 않으면 주님도 어쩌지 못합니다. 

 

고향 사람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못한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무지의 고향사람들은 그대로 우리의 부정적 모습이기도 합니다. 결국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무지의 늪에서 벗어나야 늘 맑게 흐르는 새로운 시작의 삶입니다. 영성체송이 새롭게 마음에 와 닿습니다.

 

“주님의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타는 불’이라는 뜻의 이냐시오 성인이 흡사 세상에 던져진 주님의 회개의 불처럼 생각됩니다. 우리의 무지를 불태워 정화하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회개의 불입니다. 사랑의 불로 오시는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의 빛으로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시고 새하늘과 새땅의 새삶을 살게 하십니다. 끝으로 이냐시오 성인이 선물하신 기도문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오! 주님, 저의 자유를 모두 드리오니 당신 마음대로 하소서. 
저의 생각과 이해력, 저의 모든 의지를 받으소서. 
제가 가진 것은 모두 당신께서 저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제 당신께 이 모든 것을 온전히 도로 돌려드려 
당신께 맡깁니다. 그러하오니, 당신의 뜻대로 처리하소서. 
저에게는 오직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함께 주소서. 
그러면 저는 충분하게 가져 
다른 것을 더 이상 찾지 않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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