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 -구원의 길-2020.8.7.연중 제18주간 금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Aug 0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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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8.7.연중 제18주간 금요일                                                  나훔2,1.3;3,1-3.6-7 마태16,24-28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

-구원의 길-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화두같은 말마디는 누구나의 관심 주제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바로 좋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제 졸저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벌써 출간된지 13년이 지났습니다. 우선 제목을 보고 읽는 책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바로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잘 살 때 참으로 잘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 바로 오늘 복음의 소제목이 답을 줍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막연한 질문이 더 구체화됩니다. 답은 간단명료합니다. 복음 말씀대로 예수님을 따라 살면 됩니다. 참으로 생명에 이르는 진리의 길, 구원의 길은 십자가의 길 하나뿐입니다.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은 결코 ‘나를 사랑하라’, ‘나를 믿으라’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단 하나 ‘나를 따라라’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루가 복음(9,23) 말씀대로 ‘날마다’를 집어 넣었습니다. 몇날이 아니라 평생 죽을 때까지 날마다 십자가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저 또한 하루하루 목숨을 걸고 십자가의 길을 가듯 하루하루 목숨을 걸고 강론을 씁니다. ‘혼자alone’가 아닌 ‘더불어together’ 걷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함께 주님을 따르지만 양상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환경도, 자기 버림도, 십자가도 다 다릅니다. 똑같은 인생, 똑같은 십자가는 없습니다.

 

그러니 각자 삶의 우열이나 호오의 비교는 부질없는 일입니다. 사람마다 각자 고유의 책임의 십자가, 운명의 십자가는 다 다릅니다. 도중에 포기하지 말고, 그저 묵묵히, 충실히, 항구히, 끝까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제 페이스대로 평생 주님을 따르면 됩니다. 이런 십자가의 여정은 그대로 비움의 여정, 겸손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회개의 여정은 구체적으로 이렇게 십자가의 여정으로 표현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라 이 십자가의 여정에 항구할 때 날로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그러니 십자가의 여정은 바로 예닮의 여정, 구원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날로 쉬워져가는, 가벼워져가는 십자가의 길이 아니라 날로 힘들어지고 무거워지는 십자가의 길, 바로 이것이 영적전쟁의 현실입니다. 심신心身의 노쇠老衰와 더불어 병마病魔와의 싸움 때문입니다. 하여 하루하루 깨어 겸손히 기도하며 최선의 노력을 다해 가는 것이 얼마나 본질적이고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삶은 선물이냐 짐이냐? 참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십자가의 삶은 선물이 아니라 짐이 될 수 있습니다. 하여 고백성사 보속 처방전 으로 가장 많이 써드리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여러분 대신에 반드시 형제자매들의 세례명을 써 줍니다. 참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아 갈 때 십자가의 짐은 선물로 변합니다. 참으로 더욱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고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자발적 기쁨으로 예수님을 따라 살게 됩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방향을 잃어 방황이요 표류요 ‘일상의 늪’에 빠져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랑은 앞서 가시는 예수님 ‘방향’이 뚜렷하다는 것입니다. 세상 헛것들인 우상이나 이념들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각자 제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공부, 하느님 공부는 우리의 평생공부에 속합니다.

 

참으로 이렇게 한결같이 '넘어지면 다시 곧장 일어나' 주님을 따를 때 영적탄력도 유지되며 죄악의 유혹이나 헛된 환상에 빠지지 않고 내적평화와 안정 중에 살 수 있습니다. 인생 무지와 허무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도 십자가의 여정뿐입니다. 참 기쁨과 행복도 바로 여기 있습니다. 오늘 나훔서도 우리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나훔이란 이름의 어원도 반갑고 고맙습니다.

 

나훔은 ‘위로받은 이’를 뜻합니다. 위로를 받았기에 다른 이들도 위로할 수 있는 ‘위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나훔과 어근이 같은 유명한 이름으로는 ‘주님께서 위로하신다’를 뜻하는 느헤미야가 있습니다. 참으로 나훔은 예수님처럼 어두운 시대에 희망의 힘으로 지탱해 나아가게 하는 위로와 위안을 자기 백성에게 가져다 준 예언자였습니다. 오늘 나훔서의 서두 말씀은 그대로 이 미사중 우리에게 위로와 힘을 주시러 오시는 주님을 상징합니다.

 

“보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 평화를 알리는 이의 발이, 산을 넘어온다. 유다야, 축일을 지내고 서원을 지켜라. 불한당이 다시는 너를 넘나들지 못할 것이다. 그는 완전히 망하였다.”(나훔2,1)

 

이어 마지막까지는 죄악이 만연했던 니네베의 멸망에 관한 처절한 내용입니다. 이 또한 역설적으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면서 십자가의 길에 항구하고 충실하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십자가의 여정은 혼자의 여정이 아니라 함께 하는 도반들과 더불어의 여정입니다. 

 

우리를 위로하시는 주님은 힘겹게 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이웃 형제들을 존중하고 배려하고 위로하면서 함께 가도록 하십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도 있듯이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갈 때 끝까지 완주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등수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끝까지 완주하는 모든 이들에게 승리의 월계관을 주십니다.

 

사실 고백성사를 주며 상담을 하다보면 형제자매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조언이나 충고가 아닌 귀기울여 잘 듣는 것과 격려와 위로임을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주님께 위로와 격려를 받고 있기에 이웃을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다음 바오로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시길 빕니다.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환난을 겪을 때마다 위로해 주시어, 우리도 그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온갖 환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2코린1,3-4)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어 함께 하는 도반들과 위로와 격려를 나누며 우리 모두 ‘더불어together’ 십자가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끝으로 제 좌우명 고백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마지막 연을 나눕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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