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의 여정 -참나(眞我)의 삶-2020.8.10.월요일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258) 축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Aug 1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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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8.10.월요일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258) 축일 

2코린9,6ㄴ-10 요한12,24-25

 

 

 

비움의 여정

-참나(眞我)의 삶-

 

 

 

아침 성무일도 성 라우렌시오 축일 찬미가도 아름다웠습니다. 그대로 성인의 삶을 요약합니다.

 

“승리의 순교자를 경축하오니 사라질 재물일랑 아예 등지고

헐벗고 가난한 이 돌아보시며 양식과 재물로써 도와 주시네.

 

혹심한 불의 고문 받았었건만 견고한 마음이사 변함이 없어

튀기는 불꽃속에 협박견디며 넘치는 사랑으로 이겨냈도다.”

 

얼마전 선종하신 바오로 수사님이 수도복이 단정히 입혀진 시신의 관을 보며 스치듯 떠오른 생각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아, 수도복은 수의壽衣이구나!” 

죽음을 입고 생명을, 파스카의 삶을 살아가는 수도자임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죽어야 하나?’ 물음은 바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는 물음으로 직결됩니다. 누구나 때로 심각하게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특히 주변에서 계속 이어지는 죽음을 대할 때 마다 떠오르는 물음입니다. 얼마전 세상을 떠난 노 사제에 대한 일화도 때때로 생각납니다.

 

“4년만 더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4개월만 더 살았으면, 4일만 더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말한후 다음 날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살아도 죽음에 직면해선 너무 짧은 인생인듯 생각되여 더 살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며칠전 장익 주교님 장례미사에 참석했던 수도형제와 주고 받은 대화입니다.

 

-“은퇴 주교님은 물론 여러 노 사제들이 참석했는데 얼마 남지 않은 자신들의 삶에 대해, 또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겠네요. 나이 순으로 서있는 모습들이 흡사 죽음을 향해 줄을 서 있는 듯이 생각되네요. 오늘은 너, 내일은 나, 이런 순서로 말입니다. 장례미사에 참례한 분들은 숙연한 분위기에서 죽음 준비에 대해 많이 생각했겠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베네딕도 성인 말씀대로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사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날마다 비움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비워가는 삶이 참나의 삶입니다. 날마다 자기를 비워가는 ‘무아無我의 삶’이 역설적으로 바로 ‘진아眞我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무아의 삶이자 진아의 삶이겠습니다. 하루하루 모든 삶을 ‘비움의 계기’로 삼는 것입니다. 비워도 비워도 끝없는 비움의 여정은 비움의 주님을 닮아 참나가 되어가는 여정입니다. 결국은 내 문제로 직결되며 답은 자기비움에 있음을 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바로 오늘 복음이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한 답입니다. 언젠가 갑자기의 선종이 아니라 날마다 비우는 삶으로 죽음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씨뿌리는 삶, 나누는 삶, 주는 삶, 보살피는 삶, 섬기는 삶 등 모두가 자기를 비우는 ‘이타적利他的 삶’으로 모아집니다. 부단히 모으고 쌓는 집착의 삶이 아니라 부단히 버리고 비우는 ‘이탈離脫의 삶’입니다. 바로 이래야 진아의 삶이요 무지의 삶에서 지혜의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줄 것이다.”

 

주님을 섬김이 바로 주님을 따름입니다. 막연한 섬김이 아니라 한결같이 주고 나누고 버리면서 비움의 여정에 충실하면서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비움의 여정을 통해 주님을 섬기면서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우리들입니다. 필리비서 찬미가 한 대목이 비움의 모범이신 주님의 참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립2,7-8).

 

비움(케노시스)의 여정은 그대로 순종의 여점, 섬김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하루하루 섬김과 순종의 삶을 통해 자기를 비워가는 삶입니다. 성인들의 삶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오늘은 258년경 순교한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입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란 말도 있듯이 죽어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어 교회를 참으로 깊고 풍요롭게 한 순교 성인들입니다.

 

성인에 대한 감동적인 일화를 소개합니다. 로마의 집정관이 교회의 보물을 바치라 했을 때 보물 모두를 처리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준후 이들을, 즉 병자와 고아와 과부들을 데리고 집정과 앞에 선 다음, “이 사람들이 교회의 보물입니다.” 말했다는 일화입니다. 

 

이어 석쇠 위에 눞혀져 불에 구워져 순교했다 합니다. 성인은 로마와 여러 도시의 수호성인이면서 가난한 사람, 요리사, 소방관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교회 미술에서 성인을 상징하는 문장은 순교 도구였던 석쇠입니다. 성 암브로시오가 성인을 찬양했고 성 아우구스티노도 성인의 순교에 대해 다음같이 언급합니다.

 

“그는 주님의 식탁에서 주님을 받았기에 그 보답으로 자기 자신을 주님께 제물로 바쳐 드렸습니다.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사랑했고 죽음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더욱 주고 나누고 버리고 비우는 섬김의 삶에 항구함으로 주님을 닮게 합니다.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 들입니다. 그러니 씨뿌리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날마다 나눔과 비움의 삶에 항구하며 충실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주님과 형제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 코린토 서간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결국 모든 것이 은총입니다. 

 

우리가 나눔과 줌의 섬김의 삶에, 비움의 삶에 항구할 수 있음도 주님의 넘치는 은총 덕분입니다. 주님은 참으로 끊임없이 자기를 비우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아버지께서도 그를 존중하고 사랑하십니다. 저에겐 ‘비움의 찬가’처럼 산책때 마다 흥겹게 부르는 노래가 또 하나 있습니다. ‘금강’대신 ‘수도원’이나 ‘불암산’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금강에 살으리랐다 금강에 살으리랐다 운무 더불고 금강에 살으리랐다

홍진에 썩은 명리야 아는 체나 하리오.

이몸이 스러진뒤에 혼이 정녕 있을진대 혼이나마 길이길이 금강에 살으리랐다.

생전에 더럽힌 마음 명경같이 하고자.”-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비움의 여정에, 끊임없이 나누고 주는 씨뿌리는 삶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게 하십니다. 하여 우리 모두 참나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이래야 마지막 비움인 죽음도 아름답게, 품위있게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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