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8.14.금요일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1894-1941) 기념일
에제16,1-15.60.63 마태19,3-12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
-주님 중심의 홀로와 더불어의 삶-
어제도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혼자만이 아닌 더불어의 삶 때문이었습니다. 점심식사후 즉시 시냇가 물오리를 구경하고 동요를 힘차게 부르고 돌아오던 중, 수도원 성전에서 기도하고 돌아가던 착한 자매를 만나 잠시 함께 걸으며 동요를 부르고 십자로 중앙에서 주님을 중심에 모시고 사진도 찍고 강복도 드렸습니다. 나이 70을 넘으니 이런 자유로움입니다.
-“사랑하는 자매님! 너무 예쁘고 멋져요! 늘 이렇게 사세요!”
“신부님! 오늘 저에게 특별한 노래 선물을 주셔서 즐겁고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오늘은 사진도 예쁘게 나왔습니다. ㅎ ㅎ 감사합니다!!”-
마침 오랜만에 처음으로 남편과 피정온 자매가 있어 9시경이 끝나자마자 형제님을 만나자하여 고백성사와 강복을 드리고 십자가의 주님을 중심으로 하여 부부 사진을 찍어 전송해 드렸습니다.
-“너무 멋지고 아름다운 부부예요! 늘 이렇게 사세요!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감사 감사 감사합니다!!! 신부님이 부르지 않으셨으면 그냥 간다고 했는데, 어쩌나 하고 있었는데, 정말 고맙습니다.”-
이웃이 행복할 때 참으로 나도 행복합니다. 이웃의 행복이 나의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중심으로 홀로와 더불어의 삶일 때 행복한 삶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수녀님으로부터 받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동영상 메시지도 참 아름다웠습니다. 진리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글입니다.
-“강은 자신의 물을 마시지 않고
나무는 자신의 열매를 먹지 않으며
태양은 스스로를 비추지 않고
꽃은 자신을 위하여 향기를 퍼트리지 않습니다.
남을 위해 사는 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를 돕기위해 태어났습니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말입니다.
인생은 당신이 행복할 때 좋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당신 때문에 다른 사람이 행복할 때입니다.”-
너무나 공감이 가는 참 아름다운 행복의 법칙입니다. 아마 2000년동안 가톨릭 교회 역사상 전세계 신자들과 다정하게 소통한 교황님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유일할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열렬히, 항구히 주님을 사랑할 때 홀로와 더불어 여정중에 있는 도반 형제자매들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며 참행복도 성취될 것입니다.
공동체와 유리된 혼자만의 행복은 자기도취의 착각이며 환상일 수 있습니다. 탐욕과 이기주의와 무관심이 참으로 오늘날 유해한 영적 바이러스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평생 선교사로 살다가 순교한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사제의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역시 감동적입니다. 성인에 관한 감동적인 일화를 소개합니다.
‘1941년 7월 말경, 한 수감자가 수용소를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치는 한명이 탈출하면 그 벌로 열명을 처형했다. 나치에 의해 지목된 열명의 처형 대상자중 한 폴란드 사람이 자기에게는 가족과 아이들이 있다고 울부짖자 이를 본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는 자원해서 죽겠다고 걸어 나갔다. 나치의 허락을 받고 다른 아홉명과 함께 지하 감옥에 갇힌 그는 아사형에 처해졌다.’
1982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만47세 순교하신 콜베 사제 시성식 때 그에게 ‘자비의 순교자’란 칭호를 부여했고 수감자의 주보성인으로 선포했습니다. 오늘 아름다운 본기도 역시 그대로 성인의 삶을 요약하며 참 행복한 삶의 비결을 알려 줍니다.
“하느님, 거룩한 순교자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사제가, 티없이 깨끗하신 동정녀를 열렬히 사랑하여, 영혼들을 돌보며 이웃을 사랑하게 하셨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언제나 이웃에게 봉사하며, 죽기까지 성자를 닮게 하소서.”
죽기까지 성자 예수님을 닮는 것이 참 행복한 삶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집니다.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 예언서 독서는 예루살렘의 역사를 부정한 아내의 역사에 견주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항구히 은혜를 베푸시는 하느님께 대한 배은망덕의 예루살렘 역사입니다. 삶의 중심에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이웃을 열렬히 항구히 사랑한 역사였더라면 이런 불행과 재앙은 없었을 것입니다.
“네 아름다움 때문에 너의 명성이 민족들에게 퍼져 나갔다. 내가 너에게 베푼 영화로 네 아름다움이 완전하였던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그런데 너는 네 아름다움을 믿고 네 명성에 힘입어 불륜을 저질렀다. 그러나 나는 네가 어린 시절에 너와 맺은 내 계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계약을 세우겠다.”
불륜이 상징하는 바 우상숭배의 죄입니다. 당신께 돌아와 당신 중심의 행복한 삶을 살라는 우리 모두를 향한 회개의 촉구 말씀처럼 들립니다. 예나 이제나 반복되는 악순환의 역사가 주님을 떠난 불행한 삶입니다.
오늘 복음은 혼인과 이혼, 독신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은 물론 교회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어느 경우든 주님을 중심으로 홀로와 더불어의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립단절의 혼자만의 삶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바, 이상적 부부일치의 혼인입니다. 주님을 중심으로 하나로 맺어진 부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혼과 독신도 엄연한 현실입니다. 하나만의 성소가 아닙니다. 결혼 성소도 있고 수도 성소도 있고 독신 성소도 있습니다. 옛 신학교 시절 혼인법 마지막 시간 강의를 잊지 못합니다.
“교회법을 총동원해 살 사람은 살게 해주고 도저히 못 살 사람은 헤어지게 해주라”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평생 하느님을 찾아가는 각자 고유의 인생 여정중 ‘하나의 과정’으로 보는 것입니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 중심의 교회 공동체 안에서 홀로와 더불어 여정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어디서 어떻게 살든 하느님을 향해 홀로와 더불어의 균형과 조화속에 교회 공동체 안에 머물러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020년 여름호 분도 계간지 표지의 “이렇듯 나는 홀로서 또한 더불어 산다”라는 구상 시인의 글귀와 그림도 이를 요약합니다. 아주 예전 무려 23년전 써놨던 사랑이란 자작시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사랑은 하느님 안에서
제자리를 지켜내는 거리를 견뎌내는 고독의 능력이다
지켜냄과 견뎌냄의 고독중에
순화되는 사랑, 깊어지는 사랑, 하나되는 사랑이다”-1997.3
고독과 연대는, 홀로와 더불어는 함께 갑니다. 고독의 깊이 없이는 더불어 친교의 깊이도 없습니다. 고독은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라 토마스 머튼은 갈파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의 교회 공동체 안에서 주님 중심의 홀로와 더불어의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