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사랑하라, 화내지 마라, 자비로워라-2020.9.13.연중 제24주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Sep 13,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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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9.13.연중 제24주일                                                집회27,30-28,7 로마14,7-9 마태18,21-35

 

 

 

어떻게 살 것인가?

-사랑하라, 화내지 마라, 자비로워라-

 

 

 

믿는 이들의 삶은 주님과 일치의 여정입니다. 과연 날로 주님과의 일치는 깊어지는가 이것이 유일한 영적 관심사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이 됩니다. 제 졸저중 책 제목을 보고 우선 읽어보는 것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입니다.

 

매일 수도자가 누구인가? 묻는 자가 수도자라는 말도 있습니다. 끊임없이 날마다 확인해야 할 우리의 존재입니다. 보기 드문 장마로 수도원 정문 밖, 불암산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시냇물이 참 맑습니다. 장마가 걷히고 좀 지나면 물도 마를 것입니다. 시냇물이 맑게 흐르는 그 날까지 매일 식사후 동요를 부르며 산책할 예정입니다.

 

물도 고이면 썪듯이 삶고 고이면 썪습니다.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삶, 바로 이것이 참으로 잘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맑게 흐르는 시냇물처럼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시냇물처럼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을까요? 바로 오늘 말씀에서 답을 찾았습니다.

 

첫째, “사랑하라!”입니다.

사랑하십시오.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이웃에 대한 집착없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깨끗한 사랑, 바로 아가페 사랑이 가능합니다. 분도 성인도 ‘그 무엇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와 사랑의 일치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영원한 평생 도반인 그리스도 예수님과의 일치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와 일치가 날로 깊어지는 지요. 무지로부터의 해방도, 행복도, 자유도 그리스도와 일치의 깊이에 달렸습니다. 

 

우리가 평생 매일 끊임없이 바치는 공동전례기도 수행이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도 바로 그리스도와의 일치의 관계를 깊이하기 위한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일치의 모범이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은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주님은 우리의 존재이유입니다. 그리스도는 내 삶의 중심이며 의미라는 것입니다. 아니 나의 모두라는 고백입니다. 바오로의 고백이 내 고백이 될 수 있도록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래야 세상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날로 깊어가는 주님과 일치의 관계 속에 생사를 초월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 평온히 영원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둘째, “화내지 마라!”입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화내지 않는 것입니다. 분노하지 않는 것입니다. 분노도 우리 눈을 멀게 합니다. 이성을 마비시킵니다. 그러니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는 것입니다. 분노의 후유증이 너무 큽니다. 화를 내면 싸움에 집니다. 참는 자가 온유한 자가 마지막 승리자가 됩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할 때 분노도 사라집니다. 온유하고 겸손해 집니다. 분노에 대한 답은 온유입니다. 바로 오늘 집회서도 온통 분노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분노와 진노 역시 혐오스러운 것인데도, 죄지은 사람은 이것들을 지니고 있다. 인간이 인간에게 화를 품고서, 주님께 치유를 구할 수 있겠느냐? 죽을 몸으로 태어난 인간이 분노를 품고 있으면, 누가 그의 죄를 사해 줄 수 있겠느냐? 계명을 기억하고 이웃에게 분노하지 말라. 종말을 생각하고 적개심을 버려라.”

 

화답송 후렴 역시 맥을 같이 합니다.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 그러니 주님과 관계가 깊어져 주님을 닮아 갈수록 우리 역시 자비롭고 너그러우며 분노에 더딜 것입니다. 

 

셋째, “자비로워라!”입니다.

하느님이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의 평생과제입니다. 자비는 용서입니다. 분노는 놔두면 화병이 됩니다. 용서로 즉시 의식적으로 풀어야 화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주님 말씀처럼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내가 살기위해 밥먹듯이, 숨쉬듯이 무한히 용서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용서가 상대방을 회개에로 이끌 수 있습니다. 

 

용서가 되지 않더라도 용서의 지향을 갖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고 증오나 미움을 품고 있으면 내가 먼저 다칩니다. 화병으로 내가 먼저 파괴됩니다. 집회서 또한 용서할 것을 강력히 권합니다. 

 

“복수하는 자는 주님의 복수를 만나리라.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 인간이 인간에게 자비를 품지 않으면서, 자기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느냐?”

 

오늘 복음 후반부 매정한 종의 비유도 용서하라는, 자비로워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하느님께 용서받았으니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살아도 주님의 것이요 죽어도 주님의 것이란 깨달음이 바로 용서와 자비의 샘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자비로 살아가기에 자비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몰라서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요 몰라서 자비롭지 못한 것입니다. 만탈렌트 빚진자가 상징하는 바 우리 모두입니다. 이렇게 무한한 주님의 자비의 빚을 지고 살아가는 존재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지에 눈먼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모르고 자기를 모르는 무지가 큰 죄임을 깨닫습니다. 이래서 배은망덕의 죄입니다. 그렇게 천문학적 빚을 진자가 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게 그토록 인색하다니요! 주인의 엄중한 추궁이자 질책입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네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그대로 무지에 눈멀어 인색한 이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끊임없는 용서와 자비로운 삶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같이 하실 것이다.”

 

무지에 대한 답은 그리스도 예수님뿐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알아갈수록 자기를 알며 얼마나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가는 지 깨닫습니다. 바로 여기서 용서의 사랑이, 겸손과 지혜가 나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답은 명확히 나왔습니다.

 

1.“사랑하라!”

그리스도를 항구히! 열렬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2.“화내지 마라!”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언제 어디서나 화내지 않는 것입니다.

3.“자비로워라!” 

끊임없이 용서하는 사랑으로 표현되는 자비입니다. 

 

이렇게 살 때 주님을 닮습니다. 셋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할 때 분노는 눈녹듯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서 자비가 샘솟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이런 자비의 샘이신 주님과 하나되는 시간입니다. 하여 우리 모두 미사은총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화내지 않고 자비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당신 자애가 얼마나 존귀하옵니까! 모든 사람들이 당신 날개 그늘에 피신하나이다.”(시편36,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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