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9.15.화요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히브5,7-9 요한19,25-27
아, 어머니! 고통의 성모 마리아님!
-관상, 연민, 비움, 초월-
어제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있었던 감동을 잊지 못합니다. 어느 열정과 순수의 본당사제가 손수 집필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께 대한 신앙’이란 책을 들고 선물하고자 방문한 것입니다.
고백성사후 사진 촬영차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서라 했더니 번쩍 예수님의 십자가를 내리더니 물티슈로 깨끗이 닦은 후 활짝 웃는 얼굴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슴에 품는 모습이 참 아름다운 감동이었고 그대로 사진에 담았습니다.
9월 순교자 성월,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오늘 9월15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도 참 감동적인 축일입니다. 무엇보다 세상의 고통중인 어머니들에게 무한한 위로와 격려가 되는 축일입니다. 순교자들의 모범이시오 어머니이신 고통의 성모 마리아님, 복음 환호송이 참 아름답고 적절하게 잘 정의합니다.
“동정 성모 마리아님, 복되시나이다. 당신은 주님의 십자가 아래서 죽음 없이 순교의 월계관을 받으셨나이다.”
그대로 ‘죽음 없이 순교의 월계관을 받고 싶은’ 우리의 소망을 대변하는 순교자 성월 9월에 맞이하는 오늘 축일입니다. 세월 흘러 나이들어 갈수록 새록새록 생각나는 내 육신의 어머니요, 성모 마리아 영신의 어머니입니다. 살으셔서보다 돌아가신후 끊임없는 회개에로 이끄는 내 육신의 어머니입니다.
오늘 하루는 영신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와 더불어 육신의 어머니 신 마리아를 생각하며 지내려 합니다. 문득 생각나는 “한 생을 주님 위해” 라는 성가 248장입니다.
-“한 생을 주님위해 바치신 어머니 아드님이 가신 길 함께 걸으셨네
어머니 마음 항상 아들에게 있어 예수님 계신 곳에 늘 함께 하셨네
십자가 지신 주님 뒤따가시며 지극한 고통중에 기도드리셨네
주님의 뜻을 위해 슬픔도 삼키신 말로 다 할 수 없는 어머니의 사랑”-
참으로 세상에 성모님 보다 예수님과 더 일치를 이룬 분이 어디 있을런지요! 오늘 복음전 부속가의 절절한 내용도 이를 입증합니다. 아드님 예수님의 고통과 완전히 일치되어 평생을 사신 성모 마리아 어머니이십니다. 성모 마리아님의 생애 동안 일어났던 일곱 가지 슬픔, 소위 성모 칠고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1.시메온이 아기 예수를 보면서 훗날 마리아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이라고 예언한 일.
2.헤로데의 눈을 피해 온갖 고생을 하며 이집트로 피난간 일.
3.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갔다가 소년 예수를 잃어버린 일.
4.십자가 지고 가는 예수를 만난 고통.
5.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숨을 거둔 것을 본 고통.
6.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린 고통.
7.아들 예수님을 무덤에 묻은 고통.
부모가 죽으면 뒷 산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도 있듯이 평생 예수님을 가슴에 묻고 살았을 성모 마리아입니다. 성모 칠고의 슬픔의 내용만 봐도 얼마나 아드님 예수님과 깊은 일치의 관계에 있는지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고통의 절정은 후반부, 아드님의 십자가 죽음의 현장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성모 마리아는 믿음을 통해 십자가 아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충격적 ‘자기 비움self-emptying’의 신비를 나눈다. 아마 이것은 인류 역사상 믿음의 가장 깊은 ‘케노시스kenosis(비움)’일 것이다.”
누구보다 제1독서 아드님에 대한 히브리서 고백을 절절히 체험했을 성모님이십니다. 아드님 예수님에 대한 산 증인이 성모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아드님처럼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의 비움을 배우셨을 성모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새삼 우리 인생은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워가는 ‘순종의 학교’라 정의할 수 있겠고, 하여 우리 삶의 여정은 ‘순종의 여정’이라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고 순종과 함께 가는 자기 비움입니다. 주님과 일치되어 갈수록 안팎으로 비워져 가는 우리들입니다. 얼마나 위로와 평화를 주는 진리인지요! 우리의 모든 고통이나 고난이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그대로 두면 평생 상처로 망가지거나 무너질 수 있지만 주님께 대한 순종과 비움, 자기초월의 계기로 삼을 때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 사랑의 일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장면은 비움의 절정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가 있고 그 옆에는 사랑하시는 제자가 사도 요한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모두 자기 비움의 절정에 도달했을 어머니요 제자였을 것입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의 성모님 조각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과 더불어 예수님의 시신을 품에 앉으셨을 때 피에타의 성모님은 그대로 하느님의 연민과 하나됨으로 완전히 자신을 비우셨을 것입니다.
며칠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깊은 영적 통찰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통합적 생태학integral ecology’의 필수불가결의 두 요소가 ‘관상contemplation’과 ‘연민compassion’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창조물을 하느님의 시선으로 관상할 때 저절로 지니게 되는 피조물에 대한 연민이라는 것입니다. 관상의 열매가 연민이며 연민이야말로 무관심의 유행병에 대한 최고의 백신이라는 것입니다.
관상과 연민의 모범이 예수님이자 성모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시선으로 보는 관상의 눈에 저절로 따라오는 연민의 마음이요, 연민과 더불어 자기비움의 아가페 사랑입니다. 자기비움은 ‘자기초월self-transcendence’입니다. 그러니 주님과 사랑의 일치의 길은 ‘관상-연민-비움-초월’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영적 삶을 이뤄주는 우리 삶의 자리가 어디인지 오늘 복음이 잘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 아래입니다. 흡사 이등변 삼각형을 연상케 하는 장면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편에는 성모님이 계시고 한편에는 믿는 우리들을 상징하는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모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 분명히 해 주십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딸)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평생 십자가와 부활의, 파스카의 예수님을 중심으로 예수님과 성모님을 관상하면서 연민과 비움의 사랑으로 성모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고 살아야 할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의 자리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성모님처럼 관상과 연민, 비움과 초월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하느님,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아드님 곁에 서서, 성모님도 십자가의 고통을 함께 나누게 하셨으니, 저희도 그리스도와 함께 수난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