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9.26.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코헬11,9-12.8 루카9,43ㄴ-45
기억하라, 사랑하라, 찬미하라
-늘 창조주 하느님을, 파스카 예수님을!-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모든 것이 허무로다!”
오늘 제1독서 맺음말입니다. 오늘로서 세차례에 걸친 제1독서 코헬렛도 끝납니다. 허무로 시작해서 허무로 끝납니다. 시작과 끝이 똑같습니다. 코헬렛은 지극히 현실주의자입니다. 희망이, 비전이, 꿈이 보이지 않습니다. 허무한 인생이니 인생을, 젊음을 말껏 즐겨라 권고합니다. 그러나 단 하나 창조주는 꼭 기억하라 하십니다. 공감이 갑니다만 웬지 허전합니다.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여라.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
“네 마음에서 근심을 떨쳐버리고 네 몸에서 고통을 흘려 버려라. 젊음도 청춘도 허무일뿐이다.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코헬렛은 젊은이에 대해 충고한 후 늙음과 죽음의 현실을 상기시킵니다. 누구나 겪게 되는 늙음과 죽음입니다. 부인할 수 없는 너무 적나라한 현실입니다. 생각있는 젊은이나 늙은이라면 저절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자문하게 됩니다.
“해와 빛,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고 비온 뒤 구름이 다시 몰려 오기 전에 그분을 기억하여라. 오르막을 두려워하게 되고 길에서도 무서움이 앞선다. 편도나무는 꽃이 한창이고 메뚜기는 살이 오르며 참양각초는 싹을 터뜨리는데 인간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가야만 하고, 거리에는 조객이 돌아다닌다.”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 그릇이 깨어지며 샘에서 물동이가 부서지고 우물에서 도르래가 깨어지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 되돌아간다.”
너무 어둡습니다. 허무의 짙은 구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기쁨과 희망이, 찬미와 감사가 없습니다. 삶은 허무가 아니라 찬미입니다. 계속되는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말씀은 약합니다. 창조주 하느님을 기억할뿐 아니라 사랑해야 합니다. 찬미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사랑이, 하느님 찬미가, 하느님께 감사가 답입니다. 오늘 복음의 파스카의 예수님이 답입니다. 창조주 하느님뿐 아니라 파스카 예수님을 기억하고 사랑하고 찬미하는 것입니다. 파스카 예수님을 통해 투명하게 드러나는 자비로운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허무가, 죽음이 결코 마지막 말이 될 수가 없습니다. 허무가 아니라 충만이,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부활이 마지막 말입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 궁극의 답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어제에 이어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두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수난과 부활에 대한 내용은 이 간략한 말씀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시의 제자들은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고 묻는 것도 두려워했지만, 우리는 이미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과 늘 함께 하기에 충분히 이해합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하나되어 매일 평생 끊임없이 젊어서나 늙어서나, 죽음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찬미와 감사의 시편전례기도를 바치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그러니 결코 허무의 어둠이 스며들 여지가 없습니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젊으나 늙으나 생명과 희망의 빛으로 충만한 일상입니다. 찬미와 감사, 기쁨과 평화로 가득한 삶입니다.
하여 허무가 답이 아니라 충만이 답입니다. 회색빛 우울이 아니라 밝게 빛나는 찬미가 답입니다. 기억만으로는 너무 약합니다. 파스카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아버지를 열렬히 사랑하며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파스카의 예수님과 일치하여 파스카의 기쁨을 파스카의 신비를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삶의 허무에 대한 결정적 답은 이 거룩한 미사뿐입니다. 우리의 심중을 대변하는 바오로 사도의 두 말씀을 나눕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예나 이제나 한결같이 제가 고백성사시 보속으로 가장 많이 써드리는 처방전 말씀입니다. 바로 허무주의자虛無主義者이자 현실주의자現實主義者인 코헬렛에겐 이 기쁨이, 기도가, 감사가 없습니다. 기쁨과 희망이 없는 현실주의는 허무주의로 귀착되기 마련입니다. 이어지는 다음 바오로의 말씀도 코헬렛의 허무에 대한 결정적 답이 됩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허무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8,38-39).
‘허무’란 단어는 제가 집어 넣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구원 선물 둘이 영원한 생명, 하늘 나라의 실현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이요 이런 예수님과의 일치를 실현시켜 주시는 이 거룩한 ‘미사’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허무의 어둠을 말끔히 몰아내시고 생명의 사랑 충만한 빛의 자녀로 살게 하십니다.
“주님, 당신은 대대로 저희 안식처가 되셨나이다.”(시편90,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