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믿는 이들은 누구인가? -주님의 전사, 주님의 소작인, 주님 공동집의 수호자-2020.10.4.연중 제27주일(군인주일: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1182-1226 기념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Oct 0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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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4.연중 제27주일(군인주일: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1182-1226 기념일)

이사5,1-7 필리4,6-9 마태21,33-43

 

 

 

우리 믿는 이들은 누구인가?

-주님의 전사, 주님의 소작인, 주님 공동집의 수호자-

 

 

 

오늘은 저에게 참 의미심장한 날입니다. 연중27주일 원래 원장수사 주례지만 제가 주례를 청했습니다. 바로 가톨릭 교회가 ‘9월1일 창조계를 위한 세계 기도의 날’로부터 시작된 ‘창조의 시기The Seasion of Creation’가 제 영명축일인 오늘 10월4일 성 프란치스코 축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또 한분의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이콘’으로 불릴 정도로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성인으로 종파를 초월하여 만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성인입니다. 오늘 영명축일을 지내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각별한 사랑을 쏟으시는 성인은 오늘날 기후변화로 위기를 겪고 있는 공동의 집인 지구 생태계의 수호자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공동집인 지구를 살리기 위해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과 영성을 참으로 깊이 배워 실천해야 할 위기의 시대에 어느 성인보다 각광을 받는 성인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누구입니까? 셋으로 요약됩니다. 주님의 전사, 주님의 소작인, 주님 공동집의 수호자로 오늘 강론 주제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군인주일입니다. 주님의 군인, 전사하면 저는 대천사 미카엘이 생각납니다. ‘누가 하느님과 같은 가?’ 라는 뜻의 미카엘 대천사는 천상 군대의 장수, 악에 대한 수호자입니다. 9.29일 대천사 축일에 고속도로에서 불의의 대형 교통사고시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살아나 대천사 미카엘로 부활한 느낌이라 이제 프란치스코 수도명에 대천사 미카엘을 하나 더 받았다 생각됩니다. 어제 자매님에게 보낸 카톡 답신입니다.

 

“대천사 축일에 하느님은 기적 은총으로 살려 주셨습니다. 상처도 경미하고 후유증도 전무하니 천사님이 꼭 품에 안아 주신 느낌입니다. 당시는 너무 평온해 몰랐다가 후에 기사분과 통화시 설명을 듣고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깨닫고 놀랐습니다. 이런 상황이면 십중팔구 중상아니면 즉사랍니다. 대천사 축일에 대천사 미카엘로 부활한 느낌도 듭니다. 이제부터 미카엘 대천사처럼 주님의 위대한 전사, 미카엘 대천사처럼 살고 싶습니다.”

 

코로나19팬데믹으로 인한 현재 상태를 많은 이들은 세계 제3차 대전이라 일컫곤 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전쟁이 없어졌다 합니다. 전세계가 코로나19와의 전쟁에 여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전사로서 진가를 발휘해야 할 시기가 도래한 것입니다. 물질주의, 소비주의의 원흉인 무지의 탐욕과 교만과의 영적 전쟁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던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코로나로 중상을 입고 치료중이 아닙니까? 요즘 산책시 동요와 더불어 70년대 풍미했던 김민기 작사, 작곡의 ‘늙은 군인의 노래’ 1절을 즐겨 부르곤 합니다.

 

-“나 태어나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꽃피고 눈내리길 어언 30년

무엇을 하였느냐/무엇을 바라느냐/나 죽어 이 강산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푸른 옷에 실려 간 꽃다운 이 내 청춘”-

 

저는 ‘이 강산’ 대신 ‘수도원’을, ‘군인’ 대신 ‘수도자’를, 어언 ‘30’년 대신 ‘40’년을, ‘푸른 옷’ 대신 수도복 ‘검은 옷’을 넣어 부르면 더욱 실감이 나며 비장미悲壯美까지 느낍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전사로써 깨어 영적 전투에 전념해야할 위기의 시대입니다.

 

둘째, 주님의 착하고 성실한 소작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바로 복음의 무지와 탐욕의 소작인들이 우리에게는 반면교사가 됩니다. 그런데 당시의 현실을 알고 보니 소작인들의 처지가 이해되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부유한 시골 저택은 ‘성채도시’와 다를 바 없는 ‘커다란 성’으로 묘사합니다. 여기에서 농사짓는 농노와 같은 소작인들은 토지 주인에게 추수의 1/3, 임금에게 1/3을 납부하니 부자의 횡포와 약탈에 집주인이 토지세를 징수하기 위해 보낸 종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경우는 당시 사람들에겐 자주 있는 일이였습니다. 바로 조선 시대 빈번했던 민란의 경우를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나 여기 오늘 복음의 비유에 나오는 포도밭 임자가 상징하는 이는 악한 주인이 아니라 참으로 인자하신 하느님입니다. 이런 착한 주인을 무지와 탐욕으로 몰라보고 예언자들인 종들을 아들인 예수님까지 살해한 악한 소작인들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으로 몰아간 당대의 종교지도자들입니다. 바로 초대 교회 신자들의 우의적 해석입니다. 이들 신자들은 시편의 렉시오 디비나를 통해 하느님의 승리를 읽었고 파스카 예수님의 입을 빌려 고백합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 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놀랍기만 하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포도밭이 상징하는 바 하늘 나라입니다. 이제 악한 이스라엘 소작인들은 그 권리가 몰수 되고 새 이스라엘 즉 그리스도교회의 소작인들인 우리에게 하늘 나라 포도밭이 위임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저절로 자문하게 됩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의 착하고 1.진실하고 2.성실하고 3.절실한 삼실三實의 소작인으로 섬김의 직무를 잘 수행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작인인 동시에 주님 포도밭의 포도나무이기도 합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의 포도밭 노래가 이를 말해 줍니다.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내어 좋은 포도나를 심었네. 그 가운데에 탑을 세우고 포도 확도 만들었네. 그러고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랐는데 들포도를 맺었다네. 나는 좋은 포도를 맺기를 바랐는데 어찌하여 들포도를 맺었느냐?”

 

그대로 수확의 계절인 가을에 주님의 소작인들은 우리를 성찰케 하는 말씀입니다. 좋은 포도 열매인지 들포도 인지 확인하여 분발의 노력이, 회개가 참으로 절실한 때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탄식은 공정과 정의의 좋은 포도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만군의 주님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집안이요 유다 사람들은 그분께서 좋아하시는 나무라네. 그분께서는 공정을 바라셨는데 피흘림이 웬말이냐? 정의를 바라셨는데 울부짖음이 웬말이냐?”

 

우리의 각성을,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하늘 나라 포도밭에서 ‘주님의 소작인으로 충실히 섬김의 책임과 의무를 다 했는가?’하는 것이며 ‘좋은 포도 나무가 되어 공정과 정의의 좋은 열매를 맺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셋째, 주님 공동집인 지구의 수호자로서의 삶입니다.

하늘 나라 포도밭은 교회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우리 인류의 공동집인 지구까지 확장되었고 이제부터 우리 모두는 바로 이 지구를 돌보고 지키는 수호자가 되어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기후위기에 따른 현재의 재난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가는 코로나 19와 기후변화를 통해 누구나 갖는 위기감입니다. 요즘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물론 식자들의 공통적 관심사도 주님의 공동의 집은 지구를 살리는데 있습니다. 하여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 프란치스코의 작음의 영성, 가난의 영성, 겸손의 영성이 참으로 화급한 때입니다. 이제 하느님과 이웃사랑에 자연사랑을 필히 덧붙여할 상황입니다. 

 

그 어느 때 보다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 '태양의 찬가'의 영성을 절실히 필요로 할 때임을 깨닫습니다. 장차 있을 제 장례미사 퇴장 성가로 점찍어 두고 있는 ‘오 감미로워라’로 시작되는 태양의 찬가입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압제로부터 해방후 유행됐던 ‘일터로 가자’노래 역시 산책시 부르는 요즘 애창곡입니다. 참으로 디지털 시대에 오래된 미래 같은 아날로그 환경을 그리워하게 하는 가사 1절과 3절을 소개합니다.

 

-“저 건너 푸른봉에 구름 걷히고 태양이 솟아오니 어화 새날이로구나

시냇물이 굽이굽이 감도는 들엔 이슬맞어 젖은 흙은 향기를 풍긴다.

 

낙원이 어디냐고 묻지 말게나/심으며 웃는 얼굴/어화 낙원이로구나

내가슴에 비가 개어 하늘 푸르고/내 가슴에 언제나 봄바람 분다.

어화 어화디야 일터로 가자/이 나라의 주인이 너와 나로구나.”-

 

주님은 우리 믿는 이들에게 숭고한 의무 셋을 부과하십니다. 참으로 깨어 준비하며 단순소박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전사로서, 주님의 소작인으로서, 주님 공동 집인 지구의 수호자로 사는 것입니다. 결국은 사람입니다. 감성과 인성과 영성이 최고로 조화된 전인으로서의 인간으로의 변모입니다. 

 

주님은 고맙게도 바오로 사도를 통해 그 답을 주십니다. 그러니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음 여덟가지 조목을 마음에 간직하고 살며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1.참된 것과 2.고귀한 것과 3.의로운 것과 4.정결한 것과 5.사랑스러운 것과 6.영예로운 것과 7.덕이 되는 것과 8.칭송받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마음에 간직하고 실천하십시오.”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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