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안開眼의 여정 -주님과의 끊임없는 만남-2020.11.16.월요일 성녀 제르투르다(1256-1302) 동정 기념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Nov 16,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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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6.월요일  성녀 제르투르다(1256-1302) 동정 기념일            요한묵1,1-4.5ㄴ;2,1-5ㄱ 루카18,35-43

 

 

 

개안開眼의 여정

-주님과의 끊임없는 만남-

 

 

 

오늘은 한평생 불꽃같이 치열한 삶을 살았던 13세기 독일 출신의 분도회 수녀로 가장 위대한 신비가이자 ‘예수성심의 신학자’인, 또 서울분도수녀원의 주보 성녀인 성녀 제르투르다 기념일입니다. 성녀의 일화중 늘 잊지 못하는 것은 임종전 신랑이신 주님을 만났을 때 눈이 활짝 열려 환호중에 외친 임종어입니다. 

 

헬프타 수도원에서 오랫동안 중병으로 고통받던 성녀 제르트루다는 1302년 11월 16일 “아! 신랑이 오신다. 신랑을 맞으러 나자자!”(마태25,6)라고 외치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45세였습니다. 성녀 제르트루다는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올려지지 않았지만, 1606년 교황청으로부터 공식 전례의 기도와 독서, 찬가에서 그녀를 공경할 수 있다는 공인을 받았습니다. 이후 그녀의 축일은 전 세계 가톨릭교회로 확대되었고, 1738년 교황 클레멘스 12세(Clemens XII)는 다른 제르트루다 성녀와 구별하고 그녀의 영적인 깊이를 재평가하면서 ‘위대한’(the Great)이라는 칭호를 부여하였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예리코에서 눈먼이를 고치신 복음은 늘 읽어도 새롭습니다. 주저 없이 ‘개안의 여정’으로 강론 제목을 택했고, 이 복음을 대할 때 마다 언제나 똑같은 제목입니다. 흔히 오늘 복음을 ‘작은 복음서mini-gospel’라 불릴 정도로 영적 상징들로 가득합니다. 흡사 미사장면을 연상케도 합니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눈먼 이’ 

그대로 주님을 찾는 가난한 무지의 눈먼 보편적 인간을 상징합니다. 길위에서 길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눈은 멀었어도 내면은 주님을 뵙고 싶은 갈망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그 유명한 시편 63장 2절이 생각납니다.

 

“하느님 내 하느님, 당신을 애틋이 찾나이다.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 이 몸은 당신이 그립나이다.”

 

육신의 눈은 멀었어도 내면의 눈은 주님을 향해 활짝 열려있는 맹인입니다. 참으로 양상과 정도만 다를 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눈먼 상태로 지내는지요. 편견, 선입견, 탐욕, 무지, 교만, 허영, 질투, 분노 등 눈이 멀어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직시 못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육신의 시력과는 별개로 영혼의 시력이 형편없는 소위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눈 뜬 소경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문득 어제 받은 카톡 메시지가 재미 있어 인용합니다. 제가 했던 강론 중 떠도는 메시지 일부가 저에게 도착한 것입니다. 수십년전 강론에 인용했던 ‘팬티끈과 팬티천’의 비유인데 지금도 공감이 갑니다.

 

“팬티끈이 영혼이라면 팬티천은 육신이다. 팬티끈이 튼튼하면 팬티천이 어떻든 끝까지 입을 수 있지만, 팬티끈이 약해지면 아무리 천이 곱고 튼튼해도 팬티를 입지 못한다. 팬티끈이 영혼이라면 팬티천은 육신이며, 바로 영혼과 육신의 관계가 이러하다.”

 

새삼 개안의 여정을 통해 영혼의 시력을 회복함이 얼마나 중요한 영적 수행인지 깨닫습니다. 영혼은 생래적으로 주님을 갈망합니다. 영혼의 영혼이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눈은 주님을 뵙고 싶어하고 귀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하고 두 손은 합장하여 주님께 기도드리고 싶어하며 두 발은 주님을 따르려 합니다. 주님 향한 청정욕淸淨慾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개안의 여정에 주님과의 끊임없는 만남이 얼마나 결정적이고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하여 평생 날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성전에서 시편 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 기도를 바치는 우리들입니다. 주님과 끊임없는 만남으로 육안의 시력은 약해져도 영혼의 시력은 날로 좋아지는 우리들입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자 소경의 반응이 전광석화 참으로 신속합니다. 내적으로 주님을 열망했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 측근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거푸 자비송을 바칩니다. 흡사 미사전 간절한 마음으로 자비송을 바치는 우리를 연상케 합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혼신의 힘을 다한 영혼의 부르짖음입니다. 아마 이렇게 주님을 찾지 않았더라면 주님은 그대로 지나쳐 가셨을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간절히 항구히 찾을 때 주님을 만납니다. 참으로 간절한 소원을 지닐 때 물음도 답도 짧고 순수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과 눈먼이의 주고 받는 문답이 너무나 공감이 갑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예수님의 단도직입적 질문은 주님을 찾는 우리 모두를 향한 보편적 본질적 질문입니다. 과연 무엇이라 대답하겠는지요? 답은 단 하나 눈먼 소경이 알려 줍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부연 설명하자면 오매불망 자나깨나 그리워하던 주님이신 당신을 볼 수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보라 있는 눈이요 주님의 말씀을 들으라 있는 귀요, 주님을 따르라 있는 발입니다. 다음 주님 말씀은 눈먼 소경은 물론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한 구원의 복음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지금 여기 현존하신 주님의 구원의 복음 말씀입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말씀과 즉시 맹인은 눈이 열려 다시 보게 되었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으며, 군중도 모두 화답하여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인지요! 이래서 소복음서라 하는 오늘의 복음입니다. 

 

오늘 제1독서 묵시록의 사도 요한은 주님을 만나 경책 말씀을 들으면서 역시 영혼의 눈이 활짝 열려 초발심의 열정과 자세를 회복했음이 분명합니다. 저 역시 얼마전 수도원에 부임하던 해 1988년, 32년전 40세 때, 써놨던 나무판의 한자 ‘침묵沈默’이란 글씨에 정신이 번쩍든, 순간 눈이 활짝 열린듯한 체험이 생생합니다. 다음 사도 요한을 향한 주님 말씀 역시 우리 모두를 향합니다.

 

“너는 인내심이 있어서, 내 이름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지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주님을 만나 눈이 열림으로 초발심의 열정과 자세를 회복한 사도 요한입니다. 한두번의 개안이, 회개가 아니라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과정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개안의 여정은 회개의 여정과 일치합니다. 오늘도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 모두의 눈을 활짝 열어 주시어 당신을 뵙게 합니다. 개안의 여정, 회개의 여정에 매일 미사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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