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환대의 기쁨과 평화 -회개, 환대, 찬미-2020.11.19.연중 제33주간 목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Nov 1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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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9.연중 제33주간 목요일                                                            묵시5,1-10 루카19,41-44

 

 

 

주님 환대의 기쁨과 평화

-회개, 환대, 찬미-

 

 

 

수도원에서 오래 살다보면 수도원과 깊은 인연을 지닌 귀한 분들을 만납니다. 30대 초반부터 50대 중반에 이르기 까지 무려 20년이상 홀로 살면서 수도원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형제가 생각이 납니다. 에누리 없이 그 긴 동안 ‘말씀의 처방전’을 받아다가 성실히 한결같이 살고 있는 형제입니다. 

 

그 형제는 수도원의 환대를 마치 예수님의 환대처럼 반갑고 고마워했습니다. 환대의 집, 수도원은 주님의 환대를 상징합니다. 참으로 주님의 환대를 체험한 분들은 무엇보다 주님을 환대합니다. 주님 환대의 기쁨과 평화요, 그대로 환대의 구원이 됩니다. 바로 파스카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환대하는 이 은혜로운 미사시간입니다.

 

이 형제가 선물했던 활짝 웃는 예수님 상을 얼마동안 집무실에 놔덨다가 치웠습니다. 웬지 웃는 예수님 상이 어울리지 않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서에서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일화는 없습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거의 대부분 예언자들 역시 웃음에 대한 기사가 없습니다. 평생 영전전쟁 수행중인 하느님의 전사에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웃음같기도 합니다. 참고로 분도 규칙 제7장 겸손의 열째, 열 한째 단계를 소개합니다.

 

-“겸손의 열째 단계는, 쉽게 또 빨리 웃지 않는 것이니 성서에 어리석은 자가 큰 소리를 내어 웃는다”(집회21,20;어리석은 자는 웃을 때 큰 소리를 내지만 영리한 사람은 조용히 웃음을 짓는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겸손의 열한 째 단계는, 수도승이 말할 때 온화하고 웃음이 없으며 겸손하고 정중하며 간결한 말과 이치에 맞는 말을 하고, 목소리에 있어서 큰 소리를 지르지 않는 것이다.”-

 

오늘 복음과 독서에도 웃음이 아닌 울음에 대한 귀한 기사가 나옵니다. 오히려 예언자 예수님께 더욱 어울려 보입니다. 루카복음의 행복선언과 불행선언중 다음 대목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신 예수님께서는 그 도성을 보시고 우시며 말씀하십니다. 그대로 예루살렘이 상징하는 바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우리 삶의 자리입니다. 평화의 주님을 환대하지 않아 멸망을 목전에 둔 예루살렘에 대한 안타까움의 호소요 동시에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바로 오늘 무지에 눈이 가려 주님을 환대하지 못하는 이들을 상징합니다. 참으로 회개와 더불어 주님을 환대할 때 내적 기쁨과 평화요 구원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마음을 활짝 열어 구원의 주님을 환대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예루살렘은 역설적으로 샬롬이라는 평화의 어원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평화의 임금이요 평화의 원천이신 주님을 환대하지 않음으로 멸망의 비운을 자초합니다. 마지막 예수님의 말씀도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언제입니까? 바로 여기 오늘 지금이 예루살렘인 우리가 예수님을 환대해야 할 때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중 회개와 더불어 주님을 환대하여 주님과 함께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환대할 때 기쁨과 평화요 구원의 선물입니다. 엊그제 주님을 환대했던 자캐오가 그 모범입니다. 

 

오늘 제1독서 요한 묵시록도 참 흥미롭습니다. 일곱 번 봉인된 두루마리를 펴거나 그것을 들여다 볼 분이 하늘에도 땅 위에도 땅 아래에도 하나도 없자 낙심하여 슬피 우는 요한을 위로하는 한 원로입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울었고 묵시록에서는 예수님의 애제자 요한이 웁니다. 이미 마음 활짝 열고 주님을 환대하기 시작한 요한에 대한 원로의 응답입니다. 요한은 물론 우리를 위로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울지 마라. 보라,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여 일곱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펼 수 있게 되었다.”

 

이어 영안의 활짝 열려 서 계신 어린양을 보는 요한입니다. 그 어린양은 뿔이 일곱이고 눈이 일곱입니다. 일곱눈은 온 땅에 파견된 일곱 영입니다. 뿔은 힘을 상징하며 어린양 메시아는 일곱 영, 곧 성령의 충만함을 지닌 분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영광스럽고 황송하게도 우리는 이 은혜로운 미사시간에 이런 어린양 파스카의 예수님을 환대합니다. 

 

이어 어린양이 나오시어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 손에서 두루마리를 받으시자 모두가 새 노래로 주님을 찬미합니다. 네 생물과 스물네 원로들은 저마다 수금과 향이 가득 담긴 금대접을 지녔다는 데, 바로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주님께 올리는 우리 기도 분향같게 하옵소서’ 라는 시편 구절도 생각납니다. 

 

그러니 우리가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전례기도는 그대로 향이 가득 담긴 금대접이 되는 것입니다. 파스카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환대하여 새 노래를 부르는 요한이요 우리들입니다. 바로 오늘 요한 묵시록 5장 9-10절 새 노래의 찬가는 우리가 매주간 화요일 저녁성무일도때 마다 부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다 함께 새 노래를 부르며 구원의 기쁨을 만끽하며 파스카의 어린양 예수님을 환대하는 우리들입니다.

 

“당신은 두루마리를 받으실 자격이 있사옵고 봉인을 떼실 자격이 있나이다.

당신은 죽임을 당하셨고, 당신 피로 값을 치루어, 모든 민족과 언어와 백성과 나라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해내셔서 하느님께 바치셨나이다.

당신은 우리로 하여금 한 왕국을 이루어, 우리 하느님을 섬기는 제관이 되게 하셨으니, 우리는 땅위에서 다스리리이다.”(요한묵5,9-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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