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부자富者이자 참 자유인自由人 -사랑과 봉헌, 비움과 가난, 순수와 겸손-2020.11.23.연중 제34주간 월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Nov 23,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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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3.연중 제34주간 월요일                                                    묵시14,1-3.4ㄴ-5 루카21,1-4

 

 

 

참 부자富者이자 참 자유인自由人

-사랑과 봉헌, 비움과 가난, 순수와 겸손-

 

 

 

연중 마지막 주간은 요셉 수도원의 연중피정이 관례화되어 있습니다. 이번 피정주제는 ‘곱게 늙기’입니다. 오늘 복음의 가난한 과부는 가난한 인간 실존을 상징합니다. 가난한 과부처럼 '모두를 봉헌하고 모두인 주님을 모심으로' 오늘도 내적으로 부요하고 자유로운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이 또한 주님을 닮아 곱게 늙기의 참 좋은 비결입니다. 

 

누가 참으로 부요한 자유인인지요? 바로 오늘 복음의 가난한 과부입니다. 앞서 헌금하는 부자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부자들과 가난한 과부는 자기가 헌금하는 것을 예수님이 보고 계시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부자와 가난한 과부는 그대로 우리를 비춰주는 거울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를 보고 계셨다.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군더더기 설명이 필요없는 참 명료한 오늘 복음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으로 거울처럼 우리를 비춰주는 복음입니다. 과연 나는 어디에 속하겠는지요? 참으로 누가 부요한자요 자유로운자인지 묻게 됩니다.

 

헌금은 강요가 아닌 자발적 사랑의 표현입니다. 누구나 과부처럼 생활비 전부를 헌금할 수는 없는 법이요, 주님은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자발적으로 생활비 전부를 헌금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주님께 대한 전폭적 사랑과 신뢰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참 보물이신 주님을 모셨을 때 자발적 헌금에 자기 비움입니다. 주님을 사랑할수록 저절로 세상 것들로 부터의 집착에서 이탈의 자유입니다. 하느님 맛을 알아갈수록 저절로 세상 맛, 재물 맛, 돈 맛으로부터의 이탈입니다. 

 

참으로 소유욕으로부터 벗어날수록 부요한 자요 자유로운 자입니다. 참으로 부자요 자유인은 많은 재산을 축적한자가 아니라 필요로하는 것을 최소로 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의 사람은 늘 갈증의 가난한 자요 불행한 자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습니다. 가난한 과부는 하느님을 모시는 것만으로 행복하고 만족했을 것이며 이런 자가 정말 부자요 자유로운 자입니다. 소유나 존재냐? 의 갈림길에서 복음의 부자들은 소유를 택했고 가난한 과부는 주님의 존재를 택한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존재를 삶의 중심에 확고히 모셨던 가난한 과부야 말로 참으로 진정 부자요 자유인임을 깨닫습니다.

 

깨닫고 보면 가난한 과부는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참으로 없어도 자유롭고 부자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최소한의 의식주로도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지의 탐욕에 눈이 가려 품위있고 고귀한, 부요하고 자유로운 존재임을 모르고 소유의 노예되어 살아가는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살 줄 알면 행복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하느님만이 참 행복과 참 부요의 열쇠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자기를 비울수록 하느님을 알게 되고 참 나를 알게 되어 참 행복이요 참 부자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복음의 가난한 과부로 하느님을 향해 마음의 눈이 활짝 열린 자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바로 복음의 가난한 과부를 두고 하는 말씀같습니다. 바로 이런 가난한 과부가 그대로 하늘 나라의 실현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때 마음 가난의 겸손이요 순수입니다. 화답송 시편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헛된 것에 정신을 팔지 않는 이라네. 그는 주님께 복을 받으리라. 구원의 하느님께 의로움을 얻으리라.”

 

하늘 나라는 죽어서가 아닌 이미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닮아갈수록 하늘 나라의 실현입니다. 참으로 부수적인 것들에 현혹되지 않고 본질적인 하느님 찾는 일, 사랑하는 일에 충실합니다. 이미 현세에 살면서도 궁극의 희망과 미래는 하느님께, 하늘 나라에 둡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가 그 빛나는 꿈을, 비전을, 희망을 보여줍니다. 그대로 가난한 과부의 미래요 희망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이런 궁극의 하늘 나라에 희망을 둘 때 지상에서 천국을 앞당겨 살 수 있습니다. 신비가이자 관상가인 사도 요한이 소개하는 우리의 빛나는 궁극의 미래입니다. 십사만 사천명이 상징하는 바, 가난한 과부처럼 자발적 주님 사랑과 기쁨으로 순교적 삶을 살았던 겸손과 순수의 사람들입니다.

 

“내가 또 보니 어린양이 시온산 위에 서 계셨습니다. 그와 같이 십사만 사천명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그들은 동정을 지킨 사람들로서 여자와 더불어 몸을 더럽힌 일이 없습니다. 또한 그들은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는 이들입니다.---그들의 입에서는 거짓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흠없는 사람들입니다.”

 

세례성사와 계속되는 성체성사 은총으로 우리의 이마 역시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구원의 보장이 되지 않습니다. 죽을 때 까지 이에 맞같는 삶을 살 때 구원의 표지들도 빛을 발합니다. 참으로 살아 생전 어린양이신 파스카 예수님과의 깊은 친교의 사랑을 반영하는 하늘 나라의 구원받은 성인들입니다. 

 

이들은 순수는 동정의 순수라기 보다는 하느님만을 사랑한, 갈리지 않은 마음의 순수를 뜻합니다. 결코 세상이나 우상들을 섬기노라 마음이 갈리지 않은 사람들로 거짓을 찾아 볼 수 없는 흠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십사만 사천명의 성인들은 그대로 가난한 과부는 물론 하느님만을 사랑하여 갈림없는 순수와 겸손한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는 우리의 미래입니다. 

 

그러니 외견상 가난해 보여도 하느님 사랑으로 비움의 인생 여정을 통해 자신을 비우고 비워 순수해지고 겸손해진 사람들이 진정 부자요 자유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복음의 가난한 과부는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자 평생과제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가난한 과부처럼 사랑과 봉헌, 가난과 비움, 순수와 겸손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또한 이 거룩한 미사시간은 우리 이마에 새겨진 예수님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을 새롭게 확인하는 시간이자 하늘의 십사만 사천의 성인들과 함께 찬미와 감사의 새노래를 부르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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