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하느님! -하느님 체험, 하느님 자랑-2020.12.16.대림 제3주간 수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Dec 16,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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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6.대림 제3주간 수요일                                         이사45,6ㄴ-8.18.21ㅁ-25 루카7,18ㄴ-23

 

 

 

오, 하느님!

-하느님 체험, 하느님 자랑-

 

 

 

20년전 수녀원 피정 지도시, “오, 하느님!”이란 주제로 피정 지도했던 적이 생각납니다. 이어 11년전 청담동 성당 대림 시기중 ‘하느님’이란 주제로 특강했던 적도 생각이 납니다. 오늘 역시 강론 주제는 ‘오, 하느님!-하느님 체험, 하느님 자랑-’입니다.

 

세례 받으니 “하느님!”이란 이름을 부를 수 있어서 좋다는 분도 생각이 나고, 투정 부릴 수 있는 분이 생겨서 좋다는 분도 생각이 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인간의 정의입니다. 기도하고 싶어도 부를 이름이 없어 ‘어머니!’뿐이라면 얼마나 답답하겠는지요. 주님의 기도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란 이름만 불러도 눈물이 글썽인다는 분도 생각이 납니다. 

 

마음의 병의 뿌리에는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와 하느님을 잊은 망각을 이야기 하는데 하느님을 모르고는 마음의 병인 무지의 치유도 참 요원한 일이겠습니다. 문득 웬만한 병은 하느님 이름을 부르며 치유 받았다는 인도의 성자 간디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예전 여러 번 나눴던 예화도 생각이 납니다. 초등학교때 친구가 수도원을 방문하여 장시간 이야기 했고 저는 듣기만 했습니다. 할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야기의 요지인즉 자식자랑과 돈자랑이었습니다. 일종의 인생 성공담이었던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나는 무슨 자랑이 있나? 생각하던 중 퍼뜩 떠오른 것이 ‘하느님 자랑’이었습니다. 퍼내도 퍼내도 끊임없이 샘솟는 하느님 자랑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수도승 삶 자체가 하느님 자랑의 삶임을 깨달았습니다. 하느님 자랑을 하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사제서품후 32년 동안 매일 강론 역시 하느님 자랑에 속합니다. 새삼 무슨 하느님 체험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지요! 이렇게 살아있음이 하느님 체험인데 말입니다. 지나번 대형교통사고시 무사할 수 있었던 것도 저에겐 각별한 하느님 체험이었습니다. 사람눈에 우연이지 하느님 눈엔 다 필연의 섭리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인간 무지의 병의 근원적 치료도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아는 길뿐이 없습니다. 그러니 하느님 체험의 공부는 평생 공부가 되겠습니다. 평생 하느님을 체험하고 알아가면서 참 나를 알게 되고 비로소 무지의 치유도, 무지로부터의 해방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어제 써놓은 ‘오, 하느님!’이란 시도 생각이 납니다.

 

-“날마다/한결같이

그 시간/그 자리에

찬란한/태양을 떠 올리는

하느님은/내 유일하고 영원하신/주님이자 스승이요 도반이자 경쟁자다

저절로 삶의 의욕 샘솟는다.”-

 

대담하게 고백의 시를 써놓고 나니 새 힘이 나는 듯 했습니다. 사실 아침마다 한결같이 그 시간 그 자리에 떠오르는 찬란한 태양은 저에게 하느님 체험이기도 합니다. 하여 여러 지인들에게 “사랑하는 형제님, 일출의 축복선물 받으시고 행복하세요!” 말마디와 더불어 황홀찬란한 일출 사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얼마전 써놨던 ‘말씀 태양’이란 고백시도 나눕니다.

 

-“날마다

하느님보다 훨씬 먼저 일어나

하느님 아침 태양을 쏘아 올리기 전

새벽 일찍 강론 태양을 쏘아 올림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이 행복, 이 기쁨에 산다

날마다의 강론은 내 사랑이자 운명이요 치유의 구원이자 유언이다.”-

 

자주 강론을 통해 치유의 구원과 자유를 체험하니 저에겐 이 또한 하느님 체험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만날 때, 하느님을 체험할 때 무지의 치유와 더불어 영육의 치유와 구원임을 믿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신비가이자 시인인 예언자 이사야의 하느님 체험의 고백은 얼마나 고무적인지요. 

 

“내가 하느님이고 다른 이가 없다. 나는 빚을 만드는 이요 어둠을 창조하는 이다. 나는 행복을 주는 이요 불행을 일으키는 이다. 나 주님이 이 모든 것을 이룬다.”

 

“하늘을 창조하신 분, 그분께서 하느님이시다. 땅을 빚으시고 땅을 만드신분, 그분께서 그것을 굳게 세우셨다. 그분께서는 그것을 혼돈으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살 수 있는 곳으로 빚어 만드셨다. 내가 주님이다. 다른 이가 없다. 나 주님이 아니냐? 나밖에는 다른 신이 아무도 없다. 의롭고 구원을 베푸는 하느님,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 땅끝들아, 모두 나에게 돌아와 구원을 받아라. 나는 하느님, 다른 이가 없다.”

 

이런 하느님을 잊으니 중심을 잃고, 길을 잃고 방황이요 혼란입니다. 인간이, 세상이 물음이라면 답은 하느님뿐인데 하느님 없이 답을 찾으려니 삶은 더욱 복잡해지고 혼란해지고 힘들어집니다. 하느님이 없으니 애당초 회개와 겸손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느님 중심을 잃으니 부평초처럼 뿌리 없이 표류하는 삶이요 무엇보다 허무와 무지의 늪에서 벗어날 길이 요원합니다.

 

우리가 체험하는 하느님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하느님 체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이뤄집니다. 그리스도와 일치의 체험은 그대로 하느님과의 일치 체험입니다. 보십시오, 오늘 복음 역시 이사야서의 하느님이 놀라운 능력이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지 않습니까?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는 하느님의 치유와 구원과 자유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된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 제자들에 대한 말씀은 그대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참으로 예수님과 일치되어 눈만 열리면 모두가 하느님 체험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합니다. 동방 수도승에 대한 일화도 생각납니다. 언제나 싱글벙글 웃는 수도승을 보며 어느 순례자가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지 물었을 때의 답변입니다. “숴워요, 아주 쉽습니다.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입니다.” 제 행복기도, 일명 예닮기도중 한연도 생각이 납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오늘날 코로나19 팬데믹은 바로 우리 존재의 근원인 하느님을 찾으라는, 하느님께 돌아오라는 회개의 표징입니다. 넓이에서가 아닌 삶의 깊이의 중심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만나는 하느님입니다. 불가의 돈오점수頓悟漸修도 그대로 통합니다. 하느님을 체험해 깨달아 알아 갈수록 우리의 수행도 자발적이 되어 탄력이 붙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과 일치를 통해 우리의 무지와 허무의 병을 치유해 주시며 참으로 온전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려 구원이 피어나게, 의로움도 함께 싹트게 하여라. 나 주님이 이것을 창조하셨다.”(이사45,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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