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팬데믹 시대-어떻게 살아야 하나?” -은총, 겸손, 관상, 순종-2020.12.20.대림 제4주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Dec 2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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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20.대림 제4주일 

2사무7,1-5.8ㄷ-12.14ㄱ.16 로마16,25-27 루카1,26-38

 

 

 

“코로나19팬데믹 시대-어떻게 살아야 하나?”

-은총, 겸손, 관상, 순종-

 

 

 

오늘은 대림 제4주일인 12월20일, 주님 오실 성탄절도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주님 성탄을 앞두고 이렇게 코로나19로 인해 어둡고 무겁고 우울한 분위기의 대림시기를 보내기는 사상 초유의 일입니다. 미사때 노래한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크리스마스 캐럴도 들리지 않고 성탄 츄리도 잘 보이지 않고 발걸음도 많이 줄어 든 을씨년스러운 도심의 분위기입니다.

 

어제 하루는 코로라19 확진자가 1053명, 계속 며칠간 1000명대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방식을 전적으로 바꾸는 생태적 회개가 없이는 코로나19 팬데믹은 재난의 끝이 아니라 시작일 거라고 합니다. 성장의 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코로나 팬데믹 시대-어떻게 살아야 하나?” 화두같은 질문은 바로 오늘 강론의 주제입니다. 어제 한겨레 신문은 3면에 걸쳐 ‘코로나8고 헤쳐나갈 지혜’에 대한 기사로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석가모니는 인생8고로 생로병사와 이별, 미움, 좌절, 욕망을 일컬으며 인생고해로 규정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겨레 기자는 기발한 착상으로 코로나 8고 헤쳐나갈 지혜를 제시한 것입니다.

 

1고;만날 수 없는 고통

2고;여행할 수 없는 고통

3고;맛집 못 가는 고통

4고;생활의 균형 깨지는 고통

5고;마음껏 못노는 고통

6고;혼자 있을 수 없는 고통

7고;학교, 회사 못가는 고통

8고;무기력해지는 고통

 

코로나로 인해 직접 생존의 위협을 겪고 있는 자영업자나 가난한 현장의 사람들을 생각하면 행복한 고통, 사치스런 고통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참으로 사랑의 연대로 만이 극복할 수 있는 코로나 재앙입니다. 코로나 재앙앞에 기존의 전쟁 무기들이 얼마나 무용지물이 되었는지 인간의 무지와 탐욕의 어리석음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됩니다. 

 

코로나19는 우리를 원천의 순수와 본질로 돌아가게 합니다. 말그대로 전적 회개의 삶, 기존의 삶의 전환을 촉구합니다. 저는 감히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인생8고, 코로나8고를 헤쳐나갈 근본 처방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만들 네가지 근본 처방입니다. 코로나19팬데믹 시대; 어떻게 살아야 하나? 강론 주제에 대한 구체적 방법입니다. 

 

첫째, 은총입니다.

우선 존엄한 품위의 우리 신원에 대한 통절한 자각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은 나의 존엄한 품위의 자각이요 회복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마리아가 그 모범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의 마리아를 찾은 주님의 천사 가브리엘의 인사가 바로 마리아는 물론 우리의 고귀한 신원을 계시해 줍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바로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하나가 임마누엘같은 고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바로 눈만 열리면 깨닫게 되는 우리의 본 모습인 ‘은총이 가득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제가 보속 처방전 말씀으로 가장 많이 써드리는 성구중 하나입니다. 

 

이 말씀 처방전을 받자마자 ‘보속이 아니라 보석입니다!’ 환호하던 수녀님 모습도 생생합니다. 참으로 깊이 잘 들여다 보면 은총이 가득한 하느님의 살아 있는 보석같은 우리의 고귀한 존재임을 자각하여 이런 품위에 걸맞는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거듭되는 주님의 말씀 또한 마리아는 물론 우리 모두를 고무하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니 은총을 가득히 받은 사람답게, 하느님의 총애를 받는 사람답게 존엄한 품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둘째, 겸손입니다.

모든 덕의 어머니가 겸손입니다. 겸손humilitas과 사람homo의 어원은 흙humus입니다. 흙처럼 겸손해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교황청 전속 설교가인 카타라메싸 추기경은 교황청의 교황님을 비롯한 고위 성직자들을 위한 세 번째 대림 강론에서 특히 겸손을 강조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자 겸손이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겸손은 동전의 양면같다 합니다. 참으로 하느님만이 겸손하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겸손의 절정의 표현이 바로 우리가 고대하는 구세주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겸손은 연대입니다. 겸손으로 연대하여 공동전선을 형성할 때 코로나19란 보이지 않는 적을 퇴치할 수 있습니다. 우리와 연대하여 함께 살러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그 엄위하신 하느님께서 나자렛 고을의 마리아를 찾으셨으니 하느님 겸손의 절정입니다. 당신의 천사인 가브리엘을 통해 참으로 겸손하고 순결한 사랑의 마리아를 찾아 나선 눈밝으신 하느님이십니다.

 

겸손한 자는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자입니다. 바로 삶의 문장의 주어는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아는 자가 진정 겸손한 자입니다. 바로 제1독서에서 예언자 나탄은 주제 파악을 못하고 있는 겸손치 못한 다윗을 일깨우십니다. 주님의 집을 바치겠다는 다윗에게 주님의 정체를 환히 밝히십니다. 사실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 하나하나가 주님의 거처로 궁극의 성전, 주님의 집입니다.

 

보십시오. 온통 제1독서 사무엘 하권의 문장들의 주어는 온통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이 주어가 되어 다윗에게 행하신 위업이 동사로 표현됩니다. “나는”으로 시작되는 문장의 연속입니다. 나인 하느님께서 온통 다윗을 위해 하신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깨달을 때 참된 겸손입니다. 

 

우리 삶의 문장의 주어가 내가 아닌 주님이란 깨달음이 진정 내적 평화와 안정을 줍니다. ‘내’가 수도원에 왔다는 것과 ‘하느님’이 보내주셨다는 것은 엄청난 차이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여기까지 인도해 주셨다는 겸손한 자각에서 저절로 삶은 은총이란 고백과 더불어 감사와 찬미도 샘솟습니다. 비로소 무지와 무의미, 허무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러니 겸손은 지혜입니다. 겸손의 빛이, 지혜의 빛이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하느님의 겸손의 절정은 아드님 예수님의 ‘육화’에서 십자가 죽음의 ‘비움’에서 절정에 도달합니다.

 

셋째, 관상입니다.

코로나19는 관상의 깊이를, 공감의 넓이를 회복할 절호의 시기입니다. 관상의 깊이와 공감의 넓이는 함께 갑니다. 하느님 사랑의 관상이 깊어질수록 끼리끼리 유유상종의 편협한 사랑을 넘어 가난한 이웃에 대한 연민의 사랑으로 계속 확장되기 때문입니다. 관상의 깊이에서, 공감의 넓이에서 만나는 하느님입니다. 

 

코로나 19는 관상의 깊이, 공감의 넓이를 회복하라는 싸인입니다. 관상의 고독은 연대를 지향합니다. 하여 토마스 머튼은 일찌기 관상의 고독은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라 갈파했습니다. 거리두기, 마스크 쓰기, 좀더 침묵과 고독중에 삶의 깊이의 중심에 계신 하느님을 만나라는 표지입니다. 예전 '사랑'이란 고백시중 일부가 생각납니다.

 

-“사랑은 제자리를 견뎌내는

거리를 지켜내는 고독의 능력이다.

견뎌냄과 지켜냄과 더불어 

깊어지는 사랑

깨끗해지는 사랑

새로워지는 사랑이다”-

 

바로 관상의 모범이 마리아입니다. 관상가인 마리아는 세상의 중심이 됩니다. 당대의 사람눈에 세상의 중심같은 로마도, 알렉산드레아도, 안티오키아도, 콘스탄티노플도, 예루살렘도 하느님 눈엔 진짜 세상의 중심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이 계신 곳 모두가 세상의 중심이며 하느님과 함께 했던 관상가 마리아가 있는 삶의 자리 나자렛이 바로 진짜 세상의 중심이였던 것입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는 사막교부의 말씀은 바로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 계신 중심이니 여기서 마리아처럼 주님과 함께 관상가로 살라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내면은 얼마나 깊고 넓으며 풍요로운지요. 외적공간을 넓힐 것이 아니라 내면을 비우고 비워 내적공간을 넓혀야 함을 배웁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듣고 몹시 놀랐지만 곧 수습하여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곰곰이 생각하는 모습에서 관상가의 진면목이 잘 드러납나다. 이어지는 가브리엘 천사의 충격적인 수태고지에서도 당황하여 혼란에 빠지지 않고 순종으로 응답하니 마리아의 관상의 내공을 그대로 입증합니다.

 

넷째, 순종입니다.

삶은 순종입니다. 산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사랑입니다. 일상의 작고 큰 순종의 수행에, 순종의 여정에 한결같을 때 마지막 순종의 죽음도 아름답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참된 영성의 잣대가, 참 아름다운 덕이 순종의 덕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오랜 세월 감추어 주셨던 신비가 이제 마리아의 순종을 통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오늘 복음의 절정과도 같은 마리아의 순종의 고백, 믿음의 고백은 늘 들어도 감동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마침내 마리아의 순종의 고백으로 마리아는 주님의 거처가 주님의 감실이 됩니다. “예스YES” 순종의 응답으로 마침내 하느님의 구원섭리는 온전히 펼쳐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도 일방적으로는 일 못하십니다. 마리아의 협력이 참으로 고마웠을 하느님이십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자랑이듯, 하느님은 마리아의 자랑이어라’ 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옵니다. 

 

마리아의 놀라운 점은 시종일관, 한결같이 ‘예스맨YES-MAN’으로 순종의 삶을 사셨다는 것입니다. 결코 고난과 시련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순종으로 직면하여 받아드렸으니 삶아 있는 순교의 삶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머물러 계셨을 때, 또 예수님의 시신을 품에 안았을 때 피에타의 마리아 성모님은 그대로 비움의 절정, 순종의 절정의 모습입니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드님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삶 역시 그대로 순종의 여정이자 비움의 여정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믿음의 순종으로 이끄십니다. 

 

새삼 우리 분도회 정주의 영성이 자랑스럽습니다. 코로나 19사태로 혼란한 이들에게 참 좋은 대안이 됩니다. 언제나 거기 그 자리 주님 안에서 한결같은 정주의 삶이 본연의 참 나를 회복해 은총, 겸손, 관상, 순종의 삶을 살 수 있게 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허무한 고해인생’이 아닌 주님과 함께 은총과 겸손, 관상과 순종의 ‘충만한 축제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홀로 지혜로우신 하느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로마16,2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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