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에서 하느님의 나라, 천국을 삽시다 --우리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2021.1.24.연중 제3주일(하느님의 말씀 주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an 24,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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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4.연중 제3주일(하느님의 말씀 주일)

요나3,1-5.10 1코린7,29-31 마르1,14-20

 

 

 

지상에서 하느님의 나라, 천국을 삽시다

-우리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절망은 없습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결코 절망, 원망, 실망의 삼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 감동, 감탄의 삼감이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 사전에 없는 말마디가 둘입니다. 절망과 무시입니다. 하느님은 절망이, 무시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정말 대죄는 자포자기 절망하는 것이요, 남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만이 미래요 희망입니다. 진정 하느님을 희망할 때 사람이 희망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희망입니다. 사람을 통해 희망의, 사랑의 하느님을 만납니다. 감동적인 기적같은 일화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결코 우연한 기적이 아니라 간절한 사람들의 삶에 응답된 하느님 사랑의 기적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기적이 있어 지상에서 천국의 꿈이 실현됩니다. 간혹 수도원 방문자와 주고 받는 대화가 생각납니다.

 

“수도원 여기가 천국입니다.”

아름다운 수도원 자연 경관을 보며 하는 말입니다.

“환경이 좋아서 천국인가요, 관계가 주님과의 관계가 형제들과의 관계가 좋아야 천국이지요! 천국과 지옥은 장소개념이 아니라 관계개념입니다. 천국같은 환경에서 천국같은 삶을 사는 이도 있고 지옥같은 삶을 사는 이도 있습니다. 사랑이, 희망이 없는 무관계의 거기가 지옥일 것입니다.”

 

몇가지 하느님 사랑의 기적 일화들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 기적입니다. 눈만 열리면 하느님 사랑의 기적들로 가득한 천국같은 세상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의 기적하면 작년 9.29일 대천사 축일 고속도로에서 대형 교통사고에도 이렇게 제가 건재할 수 있음도 결코 잊지 못할 기적입니다.

 

1.“돈 있어 행복? 주님께 봉헌하니 얼마나 좋소! 빈손으로 태어나 생명의 주님을 만나 먹을 것, 입을 것이 얼매나 많이 있냐! 주님이 주인되시니 얼마나 좋소. 신앙이 있어 참 행복합니다.”

평생 모은 재산으로 일군땅 500평과 폐지를 모아 기부한 돈을 마산교구 가톨릭 농민회에 기부한 81세 허계순 마리아 할머니의 고백입니다. 어제 가톨릭 신문 1면의 반을 채운 기사였습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말씀 주일입니다. 허할머니는 매일 기도하고 말씀을 쓰고 묵상하면서 성경에 희망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참으로 말씀에 기초한 믿음이요 희망임을 깨닫습니다.

 

2.“오늘 내 영혼 전체가 여기에 들어 있다. 바로 미국을 하나로 합치고, 국민, 나라를 통합하는 것이다. 통합없이 평화도 없다. 비통과 분노가 있을 뿐이며 빨강대 파랑, 농촌대 도시, 보수대 진보로 적을 만드는 이 야만의 전쟁을 끝내야 한다. 나는 모든 미국인을 위한 대통령이 될 것을 맹세한다.”

 

79세 고령에 미국46대 대통령에 취임한, 존 케네디 이후 두 번째 독실한 가톨릭 신자 조 바이든 대통령이, 에이브러햄 링컨 전 대통령이 1863년 노예해방을 선언할 때 썼던 표현을 인용해 전개한 감동적인 연설문 일부입니다. 이 또한 하느님 사랑의 기적입니다.

 

3.“9년만에 하느님께서 주신 손자입니다. 모든게 다 덕분입니다. 요즘은 태명胎名이라고 임신했을 때 이름을 짓습니다. 하느님 덕분에, 성령님 덕분에, 성모님 덕분에, 기도해 주시는 신부님, 수사님 덕분에 여러분 모두 덕분에, 하여 태명을 ‘덕분이’라 했습니다.”

 

무려 결혼 9년만에 외손자를 둔 하영희 라디아 자매님의 감격적 고백입니다. 즉시 화답의 메시지를 전송했습니다. “아, 사랑의 기적입니다! 하느님의 참 고마운 선물입니다! 자매님이 어려움을 끝까지 믿음으로 참아내심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응답입니다!” 정말입니다. 이런 지상에서의 천국체험에 앞서 자매님의 참으로 힘들었던 내적 사정을 알기에 결코 우연한 기적의 천국 선물이 아님을 깊이 깨닫습니다. 신비로운 산모와 아기 사진을 보며 얼마나 귀貴하고 약弱한, 참으로 정성을 다해 보살펴야할 생명이요 사랑이요 희망이요 하느님의 나라인지 깨닫습니다.

 

그러니 결론은 하느님께 애오라지 희망을 두는 이에게 결코 절망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지상에서 이런 사랑의 기적, 천국을 살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바오로 사도께서 요나 예언자가 가르쳐 주십니다.

 

첫째, 하느님의 나라를 꿈꾸십시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바로 지금이 그때입니다. 언젠가 도래할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여기 오늘 지금이 임박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영원한, 살아있는 꿈이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역시 우리가 궁극으로 꿈꿔야 하는 하느님의 나라 꿈입니다. 꿈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요즘 코로나 블루, 꿈을 잃고 우울해 하는 이들이, 청년들이 많습니다. 참으로 위기입니다. 전화위복, 전환점의 기회로 삼아 대전환, 대반전이 이뤄져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꿈꾸며 사는 것입니다. 

 

프랑스 청년들도 예외가 아닌 듯 30%가 우울한 상태라 합니다. “저에겐 더 이상 꿈이 없습니다. 학생들은 아직 살아있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우리가 살아있을까요? 유령이 되어 버린 우리 세대같습니다.” 참으로 코로나19팬데믹으로 전세계인들이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희망을, 꿈을 잃고 우울증과 분노로 힘들어 합니다. 이럴수록 ‘살기위해’ 하느님의 나라 꿈을 살아야 합니다. 꿈꾸는 자만이, 하느님의 나라를 꿈꾸는 자만이 살아남습니다. 바로 지금 오늘 하느님 꿈의 사람들을 통해 하느님의 꿈이 실현되는 때입니다. 

 

둘째, 회개하십시오. 

여기 오늘 지금 하느님의 나라 때에 대한 응답이 회개입니다. 참으로 전적 방향 전환의 새인간의 탄생이 회개입니다. 과거에 대한 반성만으로는 너무 약합니다. 회개는 현재를, 미래를 향한 역동적 새삶을 뜻합니다. 늘 새롭게 시작하는 내적혁명, 영적혁명을 뜻합니다. 

 

특히 기후위기, 기후변화, 지구온난화로 인해 존립의 위기를 겪는 공동의 집인 지구를 구하기 위한 생태적 회개가 절박한 때입니다. 개인의 회개는 물론 요나서에 나오는 니네베 사람들처럼 나라 공동체는 물론 전 세계 공동체의 전적인 회개가 참으로 절박한 때입니다. 구체적 행위의 실천으로 드러나는 회개가 지구를 공동체를 나를 살립니다.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시고,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하느님의 일방적 기적이 아니라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로 응답한 결과 백성들 모두가 살아난 기적입니다.

 

셋째, 주님을 따르십시오.

예수님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주님은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말씀하십니다. 복음을 믿는 것은 막연하지 않습니다. 회개의 열매 역시 막연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따름으로 입증되는 회개의 실천이요 하느님의 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혼자 꾸면 꿈이지만 함께 꾸면 현실이 됩니다. 

 

혼자가 아닌 연대의 공동체를 통해 실현되는 회개요 하느님의 나라 꿈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혼자 일하시지 않습니다. 즉시 뜻을 같이할 제자들을 부르시어 하느님의 나라 공동체를 이루십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부르시자 곧바로 회개하여 주님을 따라나서는 시몬과 안드레아 형제에 이어 야고보와 요한 형제입니다. 단조롭고 무의미한 반복의 삶에서 ‘구원의 출구出口’ 예수님을 만나 이제 주님을 따르는 내적여정의, 자아초월의 여정에 오른 제자들입니다. 참으로 주님과의 운명적 만남입니다. 

 

예수님과 만나 회개함으로 삶의 방향을 찾았고, 삶의 의미를 찾은 네 어부들입니다. 존재감 없이 무명의 존재로 살다가 주님을 만남으로 참 나를 찾은 사람들이요 이제부터 주님을 따름으로 참나의 실현에 하느님의 나라 꿈을 실현하게 된 복된 제자들입니다. 

 

바로 부름받은 제자들의 후예가 교회공동체요 수도공동체의 형제자매들입니다. 한두번이 따름이 아니라 살아있는 그날까지 날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새롭게 주님을 따라나서는 추종의 여정을 살아야 하는 복된 우리들입니다.

 

넷째, 초연하십시오.

집착에서 이탈로 자유로운 삶입니다. 제자들을 보세요. 부르심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릅니다. 참으로 참 보물인, 삶의 방향이자 삶의 의미이신 주님을 만날 때 저절로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버림과 비움, 내려놓음입니다. 이젠 선물들이 짐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살아갈수록 가벼워지기 보다는 이런저런 탐욕의 소유욕으로 인해 안팎으로 무거워지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참으로 날마다 채우는 삶에서 비우는 삶으로, 모으는 삶에서 버리는 삶으로의 전환이 절실합니다. 정작 부자요 행복한 사람은 주님만으로 만족한, 최소한의 소유를 필요로하는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따를 때 무집착의 이탈의 삶이요 홀가분한 자유의 초연한 삶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 모범을 보여줍니다. 여기서의 때는 언젠가의 그 때가 아니라 결정적인 카이로스의 때, 언제나 지금의 때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판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는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집착으로 인해 세상 ‘탐욕의 늪’에 빠져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하는 감정의 동요를 가능한 억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세속적인 현실에 무관심하라는 것이 아니라 깨어 살라는 권고입니다. 현세의 걱정거리에 빠지지 않고 종말론적은 삶의 자세로 날마다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이런 종말의 완성에 대한, 하느님께 대한 희망은 현실의 고난을 견디어 낼 힘을 줄뿐 아니라 현재 누리는 즐거움에 도취되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현실을 직시하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만한 세상입니다. 절망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거룩한 과제가 주어졌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의 지상에서 우리 모두 하느님의 나라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1.하느님의 나라를 꿈꿉시다.

2.회개합시다. 

3.주님을 따릅시다. 

4.홀가분한 초연한 자세로 자유롭게 삽시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하느님의 나라가 되어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 진리로 이끄소서. 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옵니다.”(시편25,4-5ㄱ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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