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복음의 일꾼이자 전사로 파견된 우리들 -하느님 나라의 평화와 치유-2021.1.26.화요일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2티모1,1-8 루카10,1-9

by 프란치스코 posted Jan 26, 202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2021.1.26.화요일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2티모1,1-8 루카10,1-9

 

 

 

주님 복음의 일꾼이자 전사로 파견된 우리들

-하느님 나라의 평화와 치유-

 

 

 

반갑고 기쁩니다. 예전 초등학교 어린시절 잠 설치며 설레는 마음으로 아침 일찍부터 일어났던 운동회날 추억이 생각납니다. 50-60년대 시골 초등학교 시절 학생들이 청군, 백군으로 나누어 싸운 운동회날은 시골의 잔치날처럼 참 풍성했습니다. 6.25 전쟁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청군과 백군의 싸움이 그렇게 흥미진진했던가 봅니다. 어릴 때 놀이도 거의 싸움 놀이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만국기가 펄럭이는 푸른 하늘에 흰 라인을 그려넣은 윤곽이 선명한 운동장의 아침 풍경은 얼마나 가슴 벅찬 행복과 부유의 시간이었던지요! 

 

꼭 오늘 이런 느낌으로 밤12시에 일어나 여러분을 맞이할 기쁨에 설레는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얼마전 강론 내용이 생각납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로 세상에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라는 내용에 참 만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언젠가의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아무리 힘들어도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야 합니다. 잠시 어느 80세 남편을 둔 70대 초반 아내의 글을 소개합니다. 이분들 역시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분들임이 분명합니다.

 

“보스코는 아직도 눈이 오면 으레 그 ‘하트병’이 도진다. 그동안 눈이 안내려 그림을 못 그려 서운했었던가 보다. 나 몰래 마당으로 내려가 아직도 내리는 눈을 맞으며 하트를 그리고 하트 안에 그가 나를 부르는 애칭 ‘나니’를 써놓는다. 삐툴삐툴 그림이지만 나이 여든에도 아직도 사랑하는 여자가 있으니 퍽 다행이고 그 사랑을 받는 여자 역시 행복하다. 곁에 남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깊이 새기는 중이다. 혼자 남아 수십년씩 살아가는 이곳 할매들마저 ‘그래도 서방 그늘이 강동팔십리江東八十里’하던 탄식이 그런 의미이리라.”(휴천재, 전순란)

 

참 순수한 사랑의 부부요 아름다운 글입니다. 이런 부부사랑 역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어제 읽은 나이제리아 출신 노숙자 에드윈의 죽음을 애도했던 교황님의 지난 주일 삼종기도 시 말씀을 잊지 못합니다. 

 

“베드로 광장 수 미터 떨어진 곳에서 46세 에드윈이란 나이제리아 출신 ‘노숙인homeless man’이 추위속에서 죽은 것이 발견되었다. 그의 불행은 똑같은 극적인 환경하에서 로마에서 죽은 다른 많은 노숙인들과 흡사했다. 그는 모든이에게 무시되었고 물론 우리들에게도 버려졌다. 

 

그를 위해 기도하자. 6세기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추위속에 한 거지의 죽음을 알았을 때, 하루종일 모든 미사들을 금지시켰다. 까닭인즉 그날은 ‘성금요일Good Friday’같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닮은 교황님의 연민의 마음이 그대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오늘 복음과 제1독서의 구조가 닮았습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일흔 두 제자를 파견하는 내용이고, 제1독서의 옥중서간은 바오로가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 티모데오에게 보내는 편지이고 또 하나의 독서는 성 티토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저는 바오로의 말씀을 빌어 여러분에게 감사와 격려의 인사를 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께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자비와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 여러분들이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그대로 복음 선포의 사명을 띠고 파견될 우리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축복 말씀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의 축복이 우리 하나하나 하느님의 나라가 되어 살게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나부터 하느님의 나라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해석이 필요합니다. 혼자서는 역부족입니다. 더불어의 삶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일꾼이, 전사가, 협력자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이들을 보내달라 기도할뿐 아니라 나 자신부터 주님 수확할 밭의 일꾼이 되어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소유의 짐을 최소화하여 단순 간편한 본질적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 향한 신망애의 힘, 진선미의 힘으로 영적 무장을 하여 이리떼 세상에서 어진(마음이 너그럽고 착하며 슬기롭고 덕행이 높음) 양들로 사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부담을 최소화하면서 평화와 치유의 일꾼과 전사가 되어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다음 대목이 우리의 사명을 일깨웁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 어느 곳에 가든지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하고 말하여라.”

 

우리 모두 주님의 평화와 치유의 일꾼과 전사로 살아갈 때 저절로 저절로 영육의 건강에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이런 삶자체가 최고의 복음 선포의 삶입니다. 새삼 주님은 우리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임을, 주님은 우리 삶의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정말 결정적 재앙이자 불행은 이런 주님을 잊을 때이겠습니다. 

 

주님을 잊어버려 삶의 목표, 방향, 중심, 의미를 잊어버리면 무질서와 더불어 안팎으로 무너져 괴물 아니면 폐인이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주님께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지만 주님을 떠나 잘못 미치면 세상것들에 중독되어 폐인이나 괴물이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자살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을 떠났기에, 주님을 잊었기에, 주님 희망의 끈을 놓쳤기에 세상 악령들의 희생자들이 된 것입니다.

 

영적전쟁 치열한 이리떼 세상 현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우리 모두 이런 주님의 평화와 치유의 일꾼이자 전사가 되어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갈 때 영육의 건강에 참 행복한 삶이요 세상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우리를 다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당신 은총과 평화와 자비의 축복으로 가득 채워 주시어 각자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살라고 파견하십니다. 제 좋아하는 행복기도 한 대목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이옵니다.“ 아멘.

 


Articles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