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나라 -배움, 섬김, 나눔-2021.2.4.연중 제4주간 목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Feb 04,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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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2.4.연중 제4주간 목요일                                                       히브12,18-19.21-24 마르6,7-13

 

 

 

하느님의 나라

-배움, 섬김, 나눔-

 

 

 

어제 입춘에 이어 지난밤 참 좋으신 주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물하셨습니다. 새하얀 순수의 사랑으로 빛나는 흰눈 가득 덮인 온 세상이 그대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같았습니다. 하얀 눈길을 걸으니 예전 써놨던 시가 생각났습니다.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

 

밤하늘의

초롱초롱 별빛 영혼으로

사는 이

 

푸른 하늘 흰구름 되어

임의 품 안에

노니는 이

 

떠오르는 태양

황홀한 사랑 동녘 향해 마냥 걷다가

사라진 이

 

첫눈 내린 하얀길

마냥 걷다가 사라져

하얀 그리움이된 이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1999.2.28

 

어제 수요일 교황님의 일반 알현 시간에는  ‘전례와 기도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일치시킨다’는 제하에 전례기도에 대한 참 유익한 가르침이 있었고 일부 내용을 소개합니다. 

 

‘교회의 전례는 그리스도를 우리 삶안에 현존케 한다. 전례는 자발적 기도 그 이상으로, 전 교회 신자들의 기초가 되는 행위의 기도이다. 전례는 사건이며 발생이며 현존이요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사적 표지들을 통해 성령 안에서 자신을 현존케 하신다.

 

전례 없는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와 같다. 그리스도는 성사가 거행되는 모든 시간마다 현존하신다. 미사는 언제나 사제뿐 아니라 그것을 체험하는 모든 신자들에 의해 거행된다. 

 

그리스도는 전례의 중심이다. 모든 신자는 성사에 온 마음으로 참여하도록 초대된다. 삶은 하느님께 대한 경배가 되도록 불림받고 있으며, 이것은 기도없이는, 특히 전례기도없이는 실현될 수 없다.”

 

자명한 진리이지만 신선한 느낌으로 와닿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의 영성은 전례영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며 개신교와의 결정적 차이이기도 합니다. 새삼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많은 신자들이 교회 전례에 참석할 수 없음은 신자들에게 얼마나 큰 영적 손실인지 깨닫게 됩니다.

 

주님과의 만남인 전례의 생활화, 일상화, 습관화를 통해 실현되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전례의 생활화, 생활의 전례화를 통해 우리 하나하나가 예수님을 닮아 하느님의 나라가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앞당겨 살게 하는 전례기도의 은총입니다. 물론 전례거행에 앞서 필히 전제되는 바, 회개입니다. 그러니 회개의 생활화, 일상화, 습관화를 이뤄주는 전례기도 수행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히브리서는 모세의 시나이산과 예수님의 시온산을 대비시키며 새계약이 이뤄지는 하느님의 나라 현실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성전안에서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를 통해 미리 맛보는 영적이며 천상적 현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산이고 살아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 집회와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또 모든 사람의 심판자 하느님께서 계시고,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이 있고, 새계약의 중개자 예수님께서 계시며, 그분께서 뿌리신 피, 곧 아벨의 피보다 더 훌륭한 것을 말하는 피가 있는 곳입니다.”

 

그대로 성전에서 거행되는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전례 축제 집회를 통하지 않고 어디서 이런 천상 예루살렘을 미리 맛보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중개자 파스카의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겠는지요! 하여 미사감사송 끝무렵에 우리는 ‘그러므로 저희도 모든 천사와 성인과 함께 한목소리로 주님의 영광을 찬양하나이다.’노래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이 되어 하느님의 도성, 천상 예루살렘을 앞당겨 체험케 하는 전례기도은총입니다. 이런 하느님 나라 체험의 관상적 행복은 선교활동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파견하신 똑같은 주님께서 우리를 각자 삶의 자리로 파견하십니다. 복음의 제자들에 대한 주님의 명령이 참 엄중합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문자 그대로 보다는 그 깊은 가르침의 속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참으로 전폭적으로 주님께 의탁하고 가능한 최소한의 간편하고 홀가분한 차림으로, 무소유의 정신으로, 영성으로 선교사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전례기도중 주님을 만났을 때 무소유 영성의 은총입니다. 

 

정말 행복한 부자는 필요를 최소화한 사람입니다. 필요가 적을수록 부자요 행복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많은 소유물을 지녔어도 끝없는 탐욕의 사람이라면 영적으로 영원히 불행한 가난한 자라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만으로 행복한 무소유의 영성으로 충만한 자유로운 제자들이요 민폐를 최소화한 ‘짐이 아닌 선물’로서의 복음 선포자의 삶입니다. 복음의 마지막 대목이 은혜롭습니다. 그대로 제자들을 통해 일하시는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주었다.”

 

그대로 우리 모두에 대한 주님의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참으로 회개로 응답할 때 영육의 온전한 치유와 더불어 하느님 나라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주님의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어제는 주님 제자들의 우선적 자질인 배움에 대해 강조했습니다. 참으로 회개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이들에게 필수적 자질이 배움이요 동시에 사랑의 섬김과 나눔임을 깨닫습니다. 참 좋은 순수한 우리 말마디가 배움에 이어 섬김과 나눔입니다. 회개의 선포, 많은 마귀를 쫓아냄, 병의 치유등 모든 사랑의 활동은 섬김과 나눔으로 요약됩니다.

 

어제 저는 참 뜻밖에 귀하고 고마운 하느님 나라를 선물 받았습니다. 존경하는 조광호 선배 사제의 사랑의 나눔과 섬김을 통해 크게 배웠습니다. ‘번거롭고 힘든 시절, 강화도에 갔다가 찍은 사진 그리고 그 에스프리(esprit;프랑스어로 "마음, 정신" 혹은 "기지, 재치"를 뜻하는 말.)를 적은 졸시拙詩옵니다.’라는 메시지와 더불어 신비로운 바다 풍경 사진 그리고 ‘강화 황산도에서' 라는 맑고 깊은 시였습니다. 

 

-“얼어붙은 

동토의 갯펄 같은 

내 영혼에

당신은 저녁 밀물로 

은밀히 스며들어

 

눈물도 메마른 내 가슴 

텅 빈 물바다 

하늘로 여시어

 

그 흔한 목선 한 척 없는 

적막한 

내 생애의 포구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어둠과 빛의 경계를 허물고 

희끗희끗

 

눈보라로 날리시네.”- 

 

흡사 주님의 위로와 평화의 미사은총을 상징하는 듯한 시입니다. 우리의 배움과 섬김과 나눔의 삶 중심에 늘 현존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각자 삶의 자리에서 배우고 섬기고 나누면서, 묵묵히, 한결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살게 하십니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에서 영원까지,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 머무르고, 그분의 의로움은 대대손손, 그분 계약을 지키는 이들에게 머무르리라.”(시편103,17-18ㄱ).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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