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祈禱와 삶 -정주定住의 ‘산, 섬, 나무’같은 삶-2021.2.7.연중 제5주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Feb 0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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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2.7.연중 제5주일                                          욥기7,1-4.6-7 1코린9,16-19.22-23 마르1,29-39

 

 

 

기도祈禱와 삶

-정주定住의 ‘산, 섬, 나무’같은 삶-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이게 사람의 정의입니다. 기도해야 사람입니다. 한결같이,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삽니다. 참 많이 강조해도 늘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늘 깨어 기도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사랑처럼 기도에도 여전히 초보자임을 깨닫습니다. 사람마다 천차만별이지만 정도의 차이일뿐 모두가 알게 모르게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영혼의 호흡같은 기도입니다. 살아있다는 자체가 기도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육지의 ‘산’과 같고, 바다의 ‘섬’같습니다. 하나하나 독특하고 고유한 품위를 지닌 산과 섬입니다. 침묵과 고독중에 묵묵히 외로움을 견뎌내고 있는 모습이 수도승을 연상하게도 합니다. 외로이 떨어져 있는 산과 섬이지만 아래의 깊이에서는 하나로 연결되었다는 점에서 그대로 사람을 닮았습니다. 사람들도 깊이의 하느님안에서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써놓은 산과 섬에 관한 시가 생각납니다. 그대로 기도하는 사람을 닮은 산과 섬입니다.

 

-“늘 

하늘에 닿아있는 

고요한 

산능선들

 

내 영혼 

 

하느님께 닿아있는 

고요한 

산능선이고 싶다”-1997.4.18.

 

-“바위섬을 

배우라

 

대응하지도 

반응하지도 

지키지도 않는다

 

비바람 파도에 

고스란히 내어맡겨 

고스란히 받아들여

깎이고 닦여

 

자기완성에 이르지 않았는가

신비롭고 아름다운 

자기완성에!”-1997.11.10.

 

오래 전에 써놨던 시입니다. 참으로 기도의 스승같은 산과 섬입니다. 나무 역시 기도하는 사람을 닮았습니다. 어제 가톨릭신문의 이해인 수녀 인터뷰 내용중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 스님을 나무에 빗댄 내용이 재미있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잎이 무성한 느티나무의 그늘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한달까요, 겸손하게 모든 이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는 서민적인 이미지가 깊게 다가왔어요.”

“법정 스님은 소나무를 연상하게 하고요. 스님에게서 사색하는 법을 배웠고 문학적인 면에서도 도반으로서 영향을 받았지요.”

 

두분 다 기도하는 산같고 섬같고 나무같은 분입니다. 참으로 기도할 때 참나의 산이 섬이 나무가 되는 맑고 향기로운 삶임을 깨닫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삽니다. 기도할 때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을 만나 참나의 산이 섬이 나무가 됩니다. 구체적으로 기도의 결과를 소개합니다.

 

첫째, 인내입니다.

인내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기도할 때 인내의 믿음입니다. 제1독서의 욥의 고백을 듣노라면 그대로 인생고해라 함이 맞습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인생고해를 힘겹게 살아가는 지요! 욥의 고백은 그대로 많은 고통을 겪고 있는 분들의 실존적 고백입니다.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 나날은 날품팔이의 나날과 같지 않은가? 그늘을 애타게 바라는 종, 삵을 고대하는 품팔이꾼 같지 않은가? 그렇게 나도 허망한 달들을 물려받고, 고통의 달들을 물려받고, 고통의 밤들을 나누어 받았네.---나의 나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게, 희망도 없이 사라져 가는구려. 기억해 주십시오, 제 목숨이 한낱 입김일 뿐임을, 제 눈은 더 이상 행복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대로 욥의 넋두리이자 기도입니다. 하느님의 끈을 꼭 잡고 있는 욥의 기도입니다. 이 역경중에도 욥이 끝까지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견딜 수 있음은 욥의 기도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께 뿌리내린 욥의 기도와 믿음입니다.

 

둘째, 사명입니다.

사람은 하느님 주신 그 고유의 사명이 있습니다. 바로 이 사명이 존재이유입니다. 결코 우연한 존재가 아닌 사명을 지닌 섭리적 존재인 인간입니다. 바로 기도하여 주님을 만날 때 발견되는 내 고유의 사명입니다. 이래야 인생허무와 무지에서 해방됩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기도의 빛입니다. 죽음의 세상을 살리는 생명의 기도입니다. 예수님 삶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외딴곳의 기도처입니다. 흡사 맑은 생명수 끊임없이 샘솟는 옹달샘을 연상케 하는 외딴곳입니다. 예수님의 유일한 쉼터이자 샘터인 외딴곳입니다. 각자 영육이 살기위해 필히 마련해야 할 외딴곳의 기도처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이런 기도를 통해 자신의 사명을 새롭게 확인하셨음이 분명합니다.

 

‘다른 이웃 고을 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자신의 사명을 고백하신후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들을 쫓아내시며 사명을 완수하시니 그대로 기도의 열매입니다. 내 고유의 사명을 다해야 할 자리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기도할 때 발견되는 내 고유의 사명 수행에 하느님 자녀 다운 삶의 실현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끊임없는 기도중에 주님을 만났고 확신에 넘처 자신의 사명을 고백합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복음 선포의 사명이요 존재이유임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막연하거나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은신지 구원의 주님을 알리는 복음 선포의 사명입니다. 바로 이 복음 선포의 사명을 발견치 못해, 사명을 살지 못해 무기력, 무의욕으로 시간 낭비하며 사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의 일치가 깊어질수록 복음 선포의 사명도 충실해 질 것입니다.

 

셋째, 치유입니다.

기도를 통해 주님을 만날 때 온전한 전인적 영육의 치유입니다. 예수님이 그 모범입니다. 예수님은 외딴곳의 기도처, 생명의 샘터이자 쉼터에서 하늘 아버지와의 깊은 친교의 일치중에 심신의 치유와 더불어 충만한 권능을 받으셨음이 분명합니다.

 

이런 주님이셨기에 만난 모든 사람들을 지체없이 치유해 주셨습니다. 시몬의 장모를 치유하시어 섬김의 직무에 복귀시키셨고,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심으로 영육을 온전케 하셨습니다.

 

참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믿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온 병자들에 마귀들린 사람들이요, 주님을 만나자 치유된 이들입니다. 치유에 앞서 우리의 기도와 믿음이 전제됨을 봅니다. 기도를 통해 주님을 만날 때 치유요 사명의 확인이요 인내의 삶으로 참나를 살 수 있습니다. 내 고유의 산같은, 섬같은, 나무같은 모습으로 하느님께 깊이 믿음의 뿌리내린 정주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각자 정주의 산, 정주의 섬, 정주의 나무같은 품위있는 하느님 자녀로서의 참 나를 살게 하십니다. 

 

-“주님을 찬미하여라.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 주시네.”(시편147,3)

“그리스도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 짊어지셨네.”(마태8,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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